12page

2016년8월31일 수요일 12 (제116호) 기획 ‘민족대표 33’은 1919년 3.1만세의거 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발표한 33인의 종교계 대표를 일컫는다.종교별로는 손병희,권동진,오세창, 임예환,나인협,홍기조,박준승,양한묵,권병덕,김완규,나용환,이종훈,홍병기,이종일,최린(이상천도교대 표15명),이승훈,박희도,이갑성,오화영,최성 모,이필주,김창준,신석구,박동완,신홍식,양전백,이명룡,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이상기독교대표 16명)한용운,백용성(이상불교대표2명)등이 다.이들은고종의인산(국장)일이3월5일이기에애도기간으로많은사람들이모는3.1일을택하여탑골공원 에서대대적인만세운동과더불어독립선언문 을 발표하기로 하였다.그러나 군중과 일경의 충돌로 대규모 폭력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한 끝에 근 처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겨 선언문을 발표하고 자진 신고후 일본경찰에 의해 잡혀갔다.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일경의 회유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최린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변절하거나 독립운동을 포기하기도하였다.박준승선생은일경의심문에서“독립할필요가무엇인가?”라는질문에“조선은본래독 립국이었으므로독립을하지않으면안된다.” 라고단호하게대답하였으며,법정에서일본인판사는“금후도독립운동을할것인가?”라는질문에“금후기 회만있으면하겠다.”라고말해불요불굴(不搖 不屈)의독립정신을드러냈다.선생은1920년10월30일경성복심법원에서이른바보안법및출판법위반으로 징역2년을받고서대문형무소에서옥고를치 렀고1927년3월24일염원하던조국광복을보지못한채눈을감았다.정부에서는선생의공훈을기리어1962 년건국훈장대통령장을추서하였다. ▶선생의생애 박준승(朴準承, 1865. 11. 24∼1927. 3. 24)선생은 1865 년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아랫배치에서 아버 지 박호진 공(公)과 어머니 면천복 여사와의 사이에 셋 째아들로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자암( 츌菴) 으로 15세인 1880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감나무골 삼요정에서 김영원 선생 으로부터 한문을 한학을 수학하면서 농업에 종사 하던 선생은 20대에 이르러 현실 문제에 눈뜨기 시 작하였다.개항이후물밀듯이몰려드는외세와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위정자 들을 보면서 선생은 점차 우국청년으로 성장하여 갔 다. 특히 일본과 청국 상인들이 공산품을 가져와 비 싸게 팔고 그 대신 싼 값으로 미곡을 구입하여 대량 으로 반출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은선생의마음을아프게하였다.그럼에도불구 하고당시의양반지배층은도탄에빠진민생의문제 를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급급하였고, 나아가외세와결탁하여일반민중에대한수탈을강 화하고 있었다. 농업을 생업으로 하던 선생은 그 같 은 외세와 봉건 지배층의 침탈을 목격하고 체험하 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반(反)침략, 반(反)봉건 의운동방략을모색하지않을 수없었다. 이 시기 그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대민족운동 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선각적 양반 을 중심으로 중인 지식인과 양인 상공업 자본가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위로부터의 개화, 개혁운동이었 고, 다른 하나는 일반 민중이 주체가 된 밑으로부터의 혁명운동이었다. 전자의 운동이념이 된 것은 개화사 상이었고, 후자의 운동이념이 된 것은 동학사상이었 다.그러나외국의선진문물을수용하여근대화를이 루고자 한 개화사상은 필연적으로 반(反)외세의 문 제에 취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외세의 침탈로 궁핍화 현상이 심화되어 일반 민중에게는 지지를 얻 을 수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제창된 동학사상은 본 래 종교이념이었지만, 외세의 침략이 구체화되고 봉 건 지배층의 수탈이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상황에서 그를 극복하려는 사회 변혁이념으로 전화하여 기능 하면서일반민중의폭넓은지지를획득하여갔다. ▶동학에입교후민족의식고취활동 1886년 선생의 나이 21세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어 머니를 모시고 청웅면 남산리에 분가하였고,1890년 스승 김영원을 찾아가 입도식을 올리고 동학에 입도 하게 된다. 선생은 민중의 입장에서 반침략, 반봉건 의 동학사상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1891년 동학에 입교하였다.이 시기 동학은 제2대 교주 최시 형의 헌신적 노력으로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전국적 인 포교조직을 구축하여 비약적인 교세확장을 이루 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기반으로 교조 최제 우의 신원을 통한 포교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1892년 전북삼례와1893년충남보은등지에서대중적인집 회를 개회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 다.특히 보은 집회에는 2만여 명의 동학교도가 참여 하여 교조 신원은 물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와 ‘제폭구민(除暴救民)’등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였 다. 1894년 1월 고부(古阜)민란을 계기로 동학농민 혁명운동이 발발하자, 동학교도이자 농민대중의 한 사람으로 선생 또한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동참하였 다. 그리하여 선생은 호남 일대에서 생명을 담보로 투쟁하였지만,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동학농민혁 명운동이 실패함에 따라 외세를 몰아내고 봉건체제 를 타파하여 자주적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려던 선 생의꿈이자당시민중의꿈은좌절되고말았다. 이후 선생은 이른바 ‘동학잔당’을 색출하여 잔혹 하게 학살하는 일제와 친일 정권의 촉수를 피해 여 기저기를 전전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결코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동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리하여 1897년 전라도 지역의 동학 접주로 선임된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와해된 포교조직을 재건하고 교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력을 쏟아 부었다. 1904년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개화 운동단체진보회가조직되지만진보회가친일단체 일진회로 변질되자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 명하고 일진회 주동자를 처단하여 사회개혁과 민 족종교로서의 정통성을 수호하였다. 이때 선생은 전라도의 유력한 접주로서 동학의 갑진(甲辰)개혁 운동시 청웅면 남산리 홈다리에서 단발(斷髮) 대 규모 집회를 주도 해 48일간의 옥중생활을 하였다. 한편 손병희와 박인호를 추종하면서 이용구 일당 에 대항하여 교인들을 수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 하여주권수호운동에앞장섰다. ▶천도교전라도순유위원장으로활동 이후 선생은 1908년 천도교 수접주(首接主)가 되었고, 1912년부터는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 장 겸 전라도 순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16년 선생은 천도교 전라도 도사에 임명되어 종 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전파하여 갔다.이같은선생의활동은민족독립을염원하는 선생의 의지이기도 하였지만,이 시기 천도교 교단 의 뜻이기도 하였다.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정치 가 자행되는 암흑과 같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천 도교는 각종 교리강습회와 수련회를 개최하여 암 암리에 민족의식을 배양하면서 민족의 앞날을 열 어가고 있었다.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 에 이른 1916년부터 천도교도들을 동원하여 독립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교주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는가 하면, 1917년에도 같은 요청이 제 기되기도 하였다. 특히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의 발의로 우선 천도교, 기독교, 유림 3종단이 연합하 고,사회계와 구관료계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한 독 립운동계획을추진하기까지하였다.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교서에 서제1차대전이후강화원칙의일환으로민족자결 주의를 천명하자,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 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 독립운동 계획 을추진하여갔다.이들은중앙학교측의인사들과합 세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1919년 1월 상순재일한국유학생들이밀사로국내에파견한송 계백으로부터2.8독립선언계획을듣게되었다.이에 손병희는“젊은학생들이이같이의거를감행하려는 이때에 우리 선배들로서는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 서독립운동계획을가속화하고,나아가다른종교계 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 다. 이에 기독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 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고,여기에 학생층이 참여 하여민족대연합전선을형성함에따라3.1운동계획 은일원화되어일사불란하게추진되었다. 선생은3.1운동계획이막바지에이른시기인2월24 일 천도교 전라도 도사로서 교주 손병희에게 기도회 의종료를보고하고,1월21일붕어(崩御)한고종황제 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그리하여 다음 날선생은손병희를방문한뒤,이어천도교중앙총부 에서권동진을만났다.이때선생은그로부터“총독부 에건의서를제출하여조선은독립할것”이라는말을 듣고, “나는 본래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 인 만큼 찬성한다” 라고 주저 없이 말하면서 3.1운동 계획에참여하였다.이로써선생은손병희,권동진,오 세창, 최린, 임예환, 권병덕,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홍병기,양한묵,이종훈,이종일 등과 함께 천 도교측민족대표15인 가운데1인으로선임되어 독립 선언서와독립통보서등에서명날인하게되었다. ▶민족대표33인중1인으로독립선언식참석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선생을 비롯한 민 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 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한용운이 대표로“오늘 우 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 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 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 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하는 요지의 식사(式辭)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는 독립만세를 3창함으로 써 거족적인 3.1운동의 불을 지폈다.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출동한일경에게피체되어경무총감 부로 압송되었다.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왜 독립 운동을 하였는가” 라는 일경의 질문에, “조선은 4 천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 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 은 독립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 를하고있는고로이좋은기회에독립하지아니하 면 안 될 줄로 생각한다” 라고 대답하여 항일 독립 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법정에 서 일 본 인 판 사 가 “피 고 는 조 선 독 립 이 될 줄 믿 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 다”고거침없이대답하여민족독립에의확고한신 념을 분출하였다. 나아가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라고 묻자, 선생 은 “금후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고 답변함으로써 불요불굴(不搖不屈)의독립정신을드러냈다.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 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이후에도 선생은 천도교 최고예우인 종법사(宗法師)에 추대 되는 등 교역자로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밝힌 대로 재차독립운동의기회를모색하다가1927년3월24 일 전북 정읍군 산외면 정량리 안계마을 자택에서 염원하던조국광복을보지못한채눈을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추서하였다.1965년6월6일정읍군민관합 동사회장으로정읍군구이동성황산에이장하였다. 3.1 만세운동의민족대표박준승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박준승선생생가①안채②사랑채③나뭇간④거름간⑤공중화장실⑥추모단⑦유허비⑧추모비⑨기념광장.이곳은기미3.1 독립운동민족대표33인중한분이신자암박준승선생께서태 어나시어성장하신성역으로임실군청웅면민들의오랜숙원사업이었던생가복원과기념공원조성사업이2006년부지매입을시작 으로1,540㎡면적에사업비7억2천만원이투입되어2013년 10월에준공을보게되었다. 박준승선생 선생의생가내부모습. 33대표의 소식(독립신문 1922년 3월 1일자) 민족대표33인의 근황을알린기사로선생은신석구, 홍병기등과함께1921년 1 1 월 5일에 만기 출옥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민족대표33인이모여선언서를발표하고있다. 吾等(오등)은 慈(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 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 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 (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 代(자손 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 의正權(정권)을永有(영유)케하노라.半萬年(반만 년)歷史(역사)의權威(권위)를仗(장)하야此(차) 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 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 發展(자유 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 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 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 개조)의 大機 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 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이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이며,全 人類(전 인류)共存同生權(공존 동생권)의 正當(정 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沮止抑制(저지억제)치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 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유사 이래) 累千年(누천 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지 今(금)에 十年(십 년) 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 (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이며, 心靈上(심령 상) 發展(발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 하)이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 손)됨이 무릇 幾何(기하)이며, 新銳(신예)와 獨 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 문화)의 大潮流 (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 보비)할 奇緣(기연) 을遺失(유실)함이무릇幾何(기하)이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先唱(선 창)하려 하면,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 탈)하려 하면,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 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 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인격 (人格)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 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 子孫孫(자자 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 (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 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刃(인)을懷(회)하고,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 (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 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 하매何强(하강)을挫(좌)치못하랴.退(퇴)하야作 (작)하매何志(하지)를展(전)치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 조규) 以來(이래) 時 時 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 (식)하얏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 (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 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아) 祖宗世業(조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 고, 我 (아) 文化民族(문화 민족)을 土昧人遇(토 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 礎(사회기초)와卓 랖(탁락)한 民族心理(민족 심 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 (소의)함을責하려안이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 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 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 한 吾人(오인)은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 (가)치 못하노라.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 (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 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 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 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배척)함이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靡(기미) 된 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 (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 상태)를 改善匡正(개 선광정)하야,自然(자연),又(우) 合理(합리)한 正 經大原(정경대원)으로歸還(귀환)케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 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 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巨益深造(거 익심조)하는今來實績(금래실적)을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 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 (확정)하고, 眞正(진정)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 (신국면)을打開(타개)함이彼此間(피차간)遠禍召 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안인가.또,二千萬(이천만)含憤蓄怨(함분축원) 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 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 (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支那人(지나인)의日本(일본)에對 (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수록 濃厚(농 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 국)이共倒同亡(공도동망)의悲運(비운)을招致(초 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야 금 正當(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 (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야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 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불안), 恐 怖(공포)로서脫出(탈출)케하는것이며,또東洋平 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 (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感情上(감정상)問題(문제)이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 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 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 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 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 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 (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 춘)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 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 한설)에 呼吸(호흡)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 (피일시)의勢(세)ㅣ라하면和風暖陽(화풍난양) 에氣脈(기맥)을振舒(진서)함은此一時(차일시) 의 勢(세)이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 (제)하고世界(세계)의變潮(변조)를 乘(승)한吾 人(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아모 忌 憚(기탄)할것업도다. 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 (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 을 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 族的(민족적)精華(정화)를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慈(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 (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 가 我(아)와 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 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 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群象(만휘 군 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 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백 세) 祖靈(조 령)이 吾等(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 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 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 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 인뎌(따름이로다) 독립선언서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