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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되 던 고종 15년 (1878년) 정시문과(底試文科)에 급제하고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대사성 (大司成)이 되는 등 여러 관직을 순조롭게 역임하였으며, 당시 권 력을 장악하고 있던 명성황후의 친족이었다. 생부 민겸호(閔請鎬)가 임오군 란 때 피살되자 벼슬을 버리고 삼년 동안 거상(居喪) , 후에 이조 참의 (更團參議)에 피 명 (被命), 세 차례에 걸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都 承답) ,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更豊參判), 해 방총관(海防總管) , 1887년에 예조판서(禮暫判書) ,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兵團判書) , 한성부 판윤, 1894년 형조판서(쩌團判書) 등의 요직을 지냈다 선생은 온순하고 청렴하였으며 애국심이 매우 강하였으며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에 개화사상을 갖게 되어 개화정책을 지지하였다. 갑오경 장추진내각이 수립되었을 때에는 1895년에 주미전권공사(!뺨美全權公使)로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텀)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 고 사직하였다. 1896년 2월의 아관파천 후 3월에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제정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그해 10월에 귀국하여 의정부 찬정(贊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897년에는 다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태리, 프랑스, 오스트리 아의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재차 유럽 여러 나라들을 순방했으며, 이때 특 명전권공사를 겸하여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다이아몬드 축하식 에도 한국사절로 참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여행에서 각국의 정치 · 경제 · 군사 · 문화의 발전 상을 견문하고 돌아와서 고종에게 우리 나라도 대대적인 근대적 개혁을 96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