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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만세운동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고자 상경하였던 김 재화(金在華) . 심두섭(沈斗燮) . 조응래(해應來) . 박대업(朴大業) 등이 독 립선언서를 비밀리에 휴대하고 귀향하여 김재화의 집에서 이강우(李康 雨) . 강달영(姜逢永) . 박대업 (;tl、大業) 등 여러 동지가 밀회를 거듭하여 진 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18일 정오에 사립 광림학교 악대원으로 있던 졸업생 이영규(李永 圭)가 비봉산에 올라 힘껏 나팔을 부는 것을 신호로 군중들은 일제히 봉 기하였다. 군중들은 악대를 선두로 애국가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성내를 일주하자 일본 헌병과 경찰이 급히 출동하여 해산시키고자 하였으나 시위 가 격렬하여 해산이 불가능하므로 소방차로 오수를 퍼붓고 곤봉으로 시 위군중을 난타하였다. 그 익일인 3월 19일 읍내의 동포들이 경영하는 상점들은 모두 철시하고 11시경에는 다시 만세시위운동을 하였으며 오후에는 군중의 수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한편 기생(妹生) 일대는 태극기를 선두로 남강 변두리를 둘러 촉석루(處石樓)를 향하여 시위하였다 또 걸인(ε人) 일대가 기를 들 고 분호 하면서 시위하였다. 시위는 20일과 21일 그리고 25일에도 계속되 어 수백 명이 체포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이 시위로 인한 수형자만 도 31명이나 되었다. 그 이후 4월부터 진주군 내동면(奈洞面) 삼계리(三逢멘)에서 박재룡(朴 在能)의 주도로 유생(힘生)들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울 때에 박재수 선생은 이에 찬몽하였다. 이 때 선생은 독립선언서 등 여러 격문을 만드는데 협력하였고, 동년 5 월 20일과 30일 등 여러차례에 걸쳐 진주군 진주 유일여관(唯一旅館)에서 강대익(姜大寶)에게 박재룡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었다. 그 해 8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 7호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여 10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여 6월을 선고 받아 상고하였으나 11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박정미(朴貞美)가 있다. 112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