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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을 무송(않松)으로 옮겨가게 되자 여러 순포(逃補)를 불러서 이르 기를 “너희들이 비록 왜놈에게 붙어서 구차히 살아가나 종자는 본시 대한 (大韓) 사람이다. 내가 지금 병이 들어가지를 못하겠으니 나를 메고 가라” 하였다. 순포(파補)들이 응하지 않으매 수판(手板)으로 때려서 두어 명을 넘어뜨리며 “조선 종자로서 장령(將令)을 이렇게 어긴단 말이냐” 하였다. 여러 왜적도 그 의기(義氣)를 장하게 여겨서 순포를 시켜서 메고 무송읍 (끊松몸)에 이르렀다. 광주(光州)로 압송되어 갔다가 다시 대구(大邱)로 옮겼는데 신문(訊問)에 대한 선생의 말이 더욱 엄정하였다. 처음 잡힐 때에 선생의 부친(父親) 박준식(朴準植)은 정신과 안색이 태 연하여 “우리 아이 한미(寒微)한 집에 태어났으나 방 속에서 죽으면 이웃 동리 에서도 혹시 모를 수가 있는데 이 죽음은 장차 천하 만국으로 하여금 알 게 될 것이니 우리 집의 경사로다" 하였다. 또 어머니는 따라가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반드시 왜놈의 음식을 먹 지 않을 것이니 죽기 전에는 내가 가서 먹을 것을 만들어 주어야겠다" 하였다. 또 압송하는 왜적이 백성을 강제로 징발하여 선생을 번갈아 메게 하는데 메는 사람이 갈릴 적마다 그 어머니가 반드시 메고 온 2명의 인부 에게 각기 1백 전씩을 주며 “우리 아이가 의병을 거느리고 다닐 적에도 일찍이 약탈한 적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이 걸음에 수고하였으니 수고한 값을 받으시오” 하였다. 듣는 이들이 감탄하 여 “이 아버지 이 어머니에 마땅한 이 아들을 낳겠구나” 하였다. 1909년 12월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나 왜놈의 손에 죽는 것보다 자결하는 것이 옳다고 결심하고 1910년 2월 8일 옥중에서 자 결하였다.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대구의 아전들이 돈을 추렴하여 초상을 치루었다. 마침 약령시(藥令市)가 열렸으므로 많은 북도의 상인들이 수백 냥을 모아 고향으로 반장(退흙)할 수 있도록 도왔 다. 뿐만 아니라 행상(行喪)이 지나는 곳에 영남의 선비들이 제전(쫓쏠)을 드리는 것이 길에 서로 연달아 술잔을 올리고 절하려 하면, 그의 어머니 는 미천한 신분으로 사대부(士大夫)의 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 102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