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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록 소시부터 정의감과 우국충정이 남달랐던 선생은 명문사립 민족학교였던 휘문보고에 진학, 항일 스트라이크 운동을 펼쳤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경성의 각 학교 대표들과 회합하여 1930년 1월 15일 9시를 기해 일제히 궐기할 것을 결의하는 등 광주학생운동을 전국 규모로 확산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해 같은 해 3월 엿장수로 가장하여 중국으로 망명, 신채호, 이희영 선생 등과 깊은 유대를 갖고 무력항일투쟁에 헌신하는 한편 국내에 여러 차례 잠입, 김성수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1933년 북경에서 일경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후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에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동지들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아 광주학생 운동 관련 부분만 혐의를 씌워 3년 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뜻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