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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이 고을 파수리 본제에서 태어나시니 어릴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부모의 촉망을 받았고 장성함에 따라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중흥은 교육이 그 관건임을 자각하여 경남도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한 후 1925년 단성보통학교 훈도로서 사도 외길의 첫 출발을 하셨다. 이후 가야보통학교를 거쳐 1927년에 모교인 함안보통학교로 전근하신 후 8.15 해방때까지 후배 제자들에게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통해 은연중에 민족정신을 고취하셨다. 후로도 초지일관 교단을 천직으로 여겨 새나라 새 교육의 방안을 모색하시다가 이해 9월에 의령국민학교장으로 임명되고 가야국민학교장 진주배영국민학교장 함안군 장학사를 역임하신 후 1955년에 전란으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한 모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여 불철주야로 교사 재건과 교재 마련에 노심초사하셨으니 전후로 모교에 재임한 것이 20년을 넘었고 항상 제자 사랑의 일념으로 관엄이 득의하여 교사들과 아동들의 숭앙을 받으셨다. 1964년 3월부터 함안군 교육장으로 취임하여 교육의 민주화와 효율화에 주소로 진력하시던 중 1967년 3월 23일 과로로 인해 향년 63세로 집무실에서 순직하시니 교육계는 저귀를 문제자들은 지주를 잃었다. 저 파수리 불성산 선영 아래 경좌의 언덕에 회장할 때 천에 가까운 조객들이 뉘 아니 오열하였으리요. 배위는 은율임씨 경희의 따님으로 부덕모의를 갖추어 내조의 공을 다하셨고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으니 남에 진섭(일명 영석)과 성섭 경섭 동섭 정섭이요. 여서는 재령 이전섭 밀양 박만규이다. 오호라 선생이 가신 지 어언 4반세기 이제야 후배와 문생들이 뜻을 모아 모교를 바라보는 이 유서 깊은 곳에 추모의 비를 세우니 만시지탄은 있으나 스승과 선배에 대한 도리라 하겠다. 선생의 곧고 맑은 생애와 깊고 넓은 제자 사랑은 길이 후대의 귀감이 되리라. 1992년 임신 12월 일 문하생 인천 이태길 삼가 짓고 후학 함안 조미제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