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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희원의 여이다. 공은 자질이 순후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지기가 강개하고 사리에 통달하였다. 약관에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심히 개탄하자 경술합방의 치욕을 당한 후로 더욱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여 국권회복의 길을 논의 모색하던 중 1919년 기미독립의거운동이 서울로부터 전개되자 공은 이에 호응하여 동지를 초치하여 태극기 및 대한독립가 각 수천매를 제작하여 각처 동지들에 전달함과 동시에 방방곡곡을 암행하면서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음 2월 18일 함안읍 시일을 기하여 밀약되었던 동지들과 합세하여 사방에서 운집한 의거 군중에게 공은 선두에서 만세와 독립가를 고창하면서 시중을 행진하니 그 위세는 태극기의 물결과 더불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 하였다. 공은 이어서 군중과 함께 각 관공서를 점거하고 유치 중인 동지들을 구출하며 군수 서장 등을 포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자창케하였으니 참으로 장엄한 의거였다. 그럴 즈음 마산에서 파견된 왜병에 의하여 공은 현장에서 피체되니 마산헌병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 실형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1919년 9월 22일에 원통하게도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하였다. 이 어찌 동족으로 비통한 일이 아니리오. 공의 유해는 함안 법수 사평동 좌편등에 반장되었는데 그 운상의 경위는 대구에서 영산까지는 대구청년단에서 영산에서 함안까지는 함안청년단에서 자진운구했으니 공의 장렬하고 값진 희생을 증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