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age


20page

문형순(이명 文時映) 모슬포경찰서장은 1897년 1월 4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하고, 일제 때 만주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1930년대 만주 한인사회 준 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었으며, 동시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었다. 해방 후 단신 월남했는데 자세한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동향이며 경찰 동지였던 전정택(평안도민회장 역임)씨는 해방직후 미군정은 상해임시정부나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 서장도 아마 북을 거치지 않고 서울로 바로 내려왔을 거라고 추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경찰에 받을 디딘 후 제주에 내려온 것으로 추정했다.(제주의소리) 1947년 5월 8일 제주경찰감찰청 경위로 경찰에 투신했다. 1948년 4·3이 발발하자 군과 경찰 그리고 서청(서북청년단)은 '빨갱이' 의혹을 받아온 '산(山)사람'들과 연루된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고 학살해 나가기 시작한다. 군과 경찰은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주민들의 자수를 강요했으나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11월 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갔다. 특히 국군 제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 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나던 시절이었다. ......... 《제주의소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문 서장은 1950년말 성산포경찰서장에서 물러난 후 당시 김호겸 서귀포경찰서장의 권유로 함께 경남경찰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이곳에서 함안경찰서장을 1년 동안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함안경찰서장을 그만 둔 후 다시 제주에 내려와 경찰 근무를 하다가 퇴임해서 쌀배급소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경찰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경찰서장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중앙에 보고했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금을 보내줘 평안도민회가 금일봉을 보태 당시 건입동 공동묘지였던 황세왓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문 서장의 묘비가 누군가 해머로 내리쳐 두 동강났다. 두 번 내리친 자국이 선명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안도민회에서는 누군가 문 서장의 묘비를 고의적으로 깨뜨렸다고 생각해서 1976년 4월 5일 평안도민회 공동묘지였던 지금의 제주대학 자리로 옮겼다가 다시 대학이 들어서면서 공동묘지를 옮기게 돼 지금의 자리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제주의소리 2005년 8월 16일)
20page

<center><font size=3>내용출처 : <a href=http://jejuhistory.co.kr/bbs/view.php?id=local&page=10&sn1=&divpage=1&sn=off&ss=on&sc=on&cate=local&cate_no=16&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47 target=_blank>고영철의 역사교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