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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함이 없이 堂堂히 抗辯함은도써 救國의 굳은 意志를 보여주었고 所謂恩觸金의 課感에 對해서는 恩警辦破錄울 지어 救國의 파시誠올 公表하고 이를 痛투함은도、써 國民에 警覺心올 불어 넣기도 하였다。 先生윤 日本官憲의 齊威追害가 날로 加重되면 될수록 抗日意識、또한 높아、져 納脫祖否를 國民에 혈훌하고 總 督統治에 抗爭할 것을 激顧하는가 하、연 좁山에서 進行中에 있던 좋內總督의 陣建立도 中止케 하는등 그의 抗爭 運動은 據大되어 갔다 。 譯感과 威齊은도 先生올 懷柔치 뭇할 것을 안 日本官憲은 마침내 -九=年十月先生을 補續지어 大邱藍歡 에 投歡하고 甚한 悔屬파 據問4로 報復하였A 나 先生은 觀然히 日本의 不義를 꾸짖고 굳응 抗爭의 氣뼈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마침 元日一賢禮에 動員된 二千餘名의 歡因를 앞에 놓고 抗日救國의 熱演을 만露하여 鐵因들을 興養시키고 日本官憲 의 府廳올 서늘하게 하기도 하였다。 先生의 抗爭意識이 이렇듯 굳어만지니 日本官憲은 이를 懷柔하려는 底意에서 一 次釋放하였A 나 出歡後先生 의 抗爭은 더욱 據散되자 다음해에 다시 投鐵、되었는데 歡中抗爭은 망하--것도 없고 甚至於藍款에서 주는 日本藥 까지도 이를 租투하고 合햄의 無效不當함을 說破한 것이었다。 先生윤 歡因三個月로 다시 釋放되었우나 抗爭을 계속하、던中 @홍松遺橋卷之七 一九一八年正月에는無脫購酒를 口實로 세번째 로 投웠되니이미先生의年歲는 七十七歲로 八十훌老에다가선혜였다。그러나先生은 조금도 屆함이없이韓 國A에對한日本酒鏡의不當性을痛默하고 도리어優王의頭骨로 酒杯를옷함을 恨漢하여日本官憲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投歡후 半年、極 度로 훌弱해진 先生은 다시 出쳤해서 抗爭을 계속하기 어려운 心身의 限界點을 깨닫고 自盡짧國할 것을 內心£로 作定한 뒤 藍歡은〕}{面會온 令亂供烈에게 앞으로 쫓文에 爛盡蠻頭、控回國 一 뻐의 八宇 로 淸動句를 대신함A로써 祖上에 復國할 것을 盟뿔하도록 遺爛하고 自盡할 日宇까지 일러준 후 八日간을 細食 끝에 이해 七月二十日狗國하였다 。 先生의 十餘年間에 걸친 熱烈하고도 觀然한 救國抗爭응 後孫들의 龜鍵A 로 널리 推짜 、 되어 있거니와 備卷의 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