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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松劉秉憲先生응 補學者로서 澈底한 愛國護民精神과 屆할줄 모르는 熱烈한 抗日功績은 이마 우리 社會에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뚫高한 狗國精神을 높이 讓揚하여 後孫의 龜鍵오로서 義土의 稱號를 올렸음응 물론 尙義 蘭를 設立하고 옳義鷹 및 쩨國紀念陣를 세워 精神을 길이 빛나게 하였고 國史編舞委員會刊行韓國獨立運動史、 韓國獨立連動史編舞委員會刊行 韓國獨立運動史、宋相薰著騎觀隨筆등을 비롯하여 그 밖에 、많은 史籍에도 그의 神精파 功績이 、기록되어 그의 不滅의 氣뼈이 높이 찬야익되、어 있을 뿐 아니라 國家에서도 髮熱까지 있어 그의 後 光응 이 나라에 、永遠히 빛날 것이다。 先生께서는 玉川府院君文熺公敵의 十六世孫오로 →八四二年음력 十一 月二十九日世居鄭안 慶北據갑에서 꿇生하여 名門안 江擾劉民門에서 代代로 이어진 갚음 隆德파 忠孝로 嚴하고도 世評높은 家訓속에 A格과 性品 이 隔뿐되었고 成長하여서는 竹下張錫擾의 門下‘에서 倫網의 根本안 性理學우로 薰隔를 받아 그의 全身은 오직 忠君愛國오로 爛滿된 것이다。 그가 「土는 保硬節이 寫貴」라 하여 硬松은도 自號한 것도 이러한 忠節의 一 端을 보여준 것이다。 ZB條約의 動結로 國權이 日本에 彈養되고 民族의 運命이 風前燈火로 놓여、진 해,에 그는 홈老로 다가선 六十 七歲의 老廳였다。그러냐 殺身救國을 굳게 決意하고 짧觸이 들어와서 집올 지켜준다는 것도 있느냐 하고 抗日救 國을 總料하고 하섰다。 一 九一O年마침내 合郭이 되자 그는 亡國亡民이 살아서 무엇하느냐 하고 여러나 E 을 總食올 하고 痛哭A로 지 내·다가 죽을지라도 그대로는 죽을 수 없다하고 죽음으로 나라를 救하겠다는 굳은 決意로 李完用등 五購、과 李容 九등 親日走狗一進會員을 屬鐵揮覆항 T것을 呼訴宣言한 鐵文을 搬布하고 日本政府와 朝解總督府에 合해抗議文올 發 、 送하는 한펀 淸國을 비롯해 英·美·露·佛등 列國에 合햄의 不當함을 呼訴하는 內容의 文案을 보내는등 抗日 救國을 實錢A로 옮겼다。 이로부터 先生은 數없이 日本官憲。-로부터 차마 받을 수 없는 海-홈파 諸感과 威壓齊追을 받았£나 l:ll- '2. p τr 용£ 367 조금도 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