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page

362 다 。 p 曉松遺積卷之七 題南의 金烏山은 治隱先生의 西山이다。山 南쪽에 연녁을 의지하、역 마을이 있£니 곧 r 上江무로서 江慶劉民의 世居하는 곳이다。解放後 王寅년에 재사를 지어 내宗義짧쩌로 한 것이 故硬松劉컸을 봉안(奉安)하기 위함이라、그 낙성되었을 혜 道內의 선바들이 다함께 말하기를 「이 어른이야말로 하고도 남을 분」이라 하였다。&꼈‘께、서 냐라가 망하다 ‘혜를 당하、여 五願을 성토(聲討)하고 萬國에 켜。고(響告)하셨고 恩陽金올 물리치고 納規를 거부하며 田標를 세우지 않고 幕籍을 하지 않고 왜、적과 싸이껴 죽、기를 맹세한지 前後九年동안에 가진 고초를 당하며쳐,서릿발 같 은 言論과 칼날같은 붓대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同脫의 가슴을 시원스리 깨우쳐서 마침내는 自決하고 야 말았우니 그 가、낸 고초 、지극함올 알 수 있다。이제 적이 물러나고 故國江山이 수치를 씻우묘로 上江한 쿠역 의 옛모습을 도루 찾아 꽃다운 자취 역력히 새로워지매 이 재사가 장차 治隱先生의 채마정(採職훔)파 南北에 마 주 서서 높은 風節을 永遠히 빛내지 않겠는가?·주손(뿜孫)載淳民께서 유물(遺文)올 간행하고 요바(基陣)를 세 우고 이제 옛터에 재사를 지어 봉안하니 조、상의 거룩하신 德과 子孫의 천양(關揚)하기 위한 훌륭한 엽적、이 더욱 공경할만 하다。몬늠 선버들이 感想을 옳은 원운(原題)에 따라 화당한 것이 수백 펀이 되으로 이를 펀치퍼하여 간 행키로 하、었 A 、냐 載淳民이마 늙£시어 長男學鍾이 뒤를 이어 이룩하니 어버이의 돗올 찰 이어받았다 하겠다。 냐와는 자、별한 사이로 또 세의(世誼)가 있£묘로 序文을 청하매 내 받들어 음미(따味)하매 股의 고사리와 품의 국화같고 쩔뺀連의 다 E ‘과 陸秀夫의 해처럼 향기롭고 빛나 n 이 혀。용하기 어려워서 .꼈의 英塊義뼈이 옳고 노래하며 감탄하는 글、퀴 속에 완연히 나타나는 듯하니 이것이라면 뒷세상에 、전하여서 틀림없을 것이다。&꼈의 -祖父넙 되시 는 漢훔公께서 孝行은도 이릎났。-니 또한 근본이 있음을 얄만하다。상가 느김을 적어기쁨과 -주모함을부치노라。 무신 중야。철 광주 李 探 鎭삼가 지음 띠宗 義齊詩貼序 鎭 中金烏、배바 治隱士 口 先生西 山也 、 國復後 、 山之陽 、 據엽빼而 有또 티 上江、江陸民世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