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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셨는지 그해 六월에 사자(關子)에게 사후 기제-죽(己쫓祝)에는 、반드시 융회 연호를 쓰고 작、진만두(觸盡蠻頭)만회국맥(鏡며國服)、역넓자로 청작구(淸動句)를 대신하라 하셨나니라。이리하여 선생은 철 식 八알만인 무오 七월 二十일 七十七세로써 옥사하시니라。사림(士林)은 조선의사 명정A로 수양산(首陽山)이 웃에 장사하고 선생의 -중의를 받들어 상의계를 만들었A、역 、광복 후는 문、컵간행은 숭의재(뚫義寶)창건이 있었고 국가에서는 건국공로상이 있었나니라。선생은 、강흥유씨(江陸劉民)로서 휘는 명헌(秉憲)、자는 주현(周顯)、만송 (簡松)은 자호이니 칠곡 북상 장강리에 세거(世居)하시니라。생각컨대 선생의 소지(素志)는 광복(光復)에 있었 고 일체의 행동은 항척에 있었나니、위에 기록한 행적오로서도 이마 일판한 정신이 그러한 것임을 보겠거니와 유문올 상세히 보면 더욱 그 지행(志行)의 소재가 소、연(昭然)한 것이다。무릇 국가의 망극한 변을 당하여 일개 포의(布衣)로서 돈세결신(遊世顯身)도 족하거늘 선생의 지행은 한갓 고절에 있지 않고 저사항적(批死抗戰)에 있 었고 또 죽음도 한갓 탁세(潤世)를 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항석을 하자는 것이었고 또한 항적도 한 갓 설분이 아니라 불멸의 정의를 부식하여 광복을 기필한데 있었나니、이것을 모르고는 선생을 얄았다 하지 뭇 할지니라。금먼 바역(陣彼)에 위정당국과 특히 박경원 도백이 주판한 그 장거는 선생의 순국에 며。、감된 바안가 하노라。이에 삼가 명(짧)하노니 온 몸윤 충분이어니 사생은 항적이어니、일념으」‘광복이어니 높아 높아라、만고 의 금오산이여、푸르러 푸르러 늘 푸른 저 솔이여 아으’ ll 。 、단기 四二九六년 八월 일 성 얼 산선 김 정 윤설 글 지 음 앞 글 씀 뒷 글 씀 선생 기 념 사 엽 회 세 움 文 만고 송령 유박이 벼 。 철 71 ~ 려 。 헌 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