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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4월30일 토요일 12 (제112호) 기획 재실(齋室)은제사(祭祀)시설로만사용하고있는것이보편적이라할수있다.그러나이재실(齋室)이효를실 천하고선조의음덕을기리는장소로사용된다면모두가바라는것이아닐까생각해본다. 그리고세상에는물질적으로풍요로운사람들과가난한사람들이있다.우리는일제강점기와6븡25동란을거치 면서이들의대립은격화되었음을알수 있 다 . 사회적지위가높거나명예를가진사람에게요구되는높은수준의도덕적의무,사회지도층이책임있는행동 을다할것을강조하는노블레스오블리주(NoblesseOblige)를실천하며이를자녀들에게 까지아낌없이물려주는등선비로서삶을살다간故박광택시조왕릉제25대참봉과그가지은재실경소재를 찾아가본다. 경소재와묘원전경벚꽃과목련이어울려져길손을잡아당긴다. ▶경소재(景素齋) 경소재는 경북 고령군 다산면 좌학리에 소재하 고 있다. 건축년도는 1971년으로 그리 멀지 않다. 정면3칸 측면1.5칸의 경소재가주목받고있는 것은 고택도 웅장함도 아니다. 경소재는 기둥에 걸린 주 련에서찾아볼수있다. 효위백행지원(孝爲百行之源, 효도는 온갖 행동 의 근원이 된다.), 인위만선지장(仁爲萬善之長, 仁 은온갖선의어른이되고,정재괘유유청경(庭載掛 柳留淸景, 뜰(정원)에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를 심 으니 맑은 경치 머물러 있고), 문근강호점활파(門 近 江 湖在波, 문에 가까운 강과 호수는 점점 물 결치며퍼져나가네.) 경모재는 효를 실천하고 선조의 음덕을 기리는 곳으로 인(仁)과 선(善)을 행하는 곳으로 낙동강 변에 위치하며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맑은 경치함께하여비친물은항상푸르다. 이는 재실을 건축한 소성(小城) 광택(光澤) 참 봉의꿈과의지가함께한것이다. 경소재가 위치한 곳은 원래 낙동강 나루터 뱃사 공의집이었다. 주변에 선조님의 묘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소성 공(小城)의 선고(先考) 소와처사공(素窩處士公, 휘炳孝)이1928년유명을달리하면서묘소를선조 의묘역아래안장하였다. 그러나 고령경찰서에서는 소와공의 묘소를 이장 하라는 통보가 온 것이다. 이는 장례 당시 수많은 만장과추모객이뒤따른게문제가되었다.호화장 례로 보인 것이다. 소와처사공은 학문이 뛰어나 많 은 제자들이 배우고자 집을 찾았고 찾아온 선비들 을 수용하기 위해 집에 별도의 학숙을 지어 후학을 길러 스승의 가는 길에 만장을 걸어 추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기아에 시달리는 주민들과 경찰들은장례를곱지않게보았을것이다. 이 에 소 성 공 은 장 례 치 른 지 얼 마 되 지 않 은 아 버 지의 묘소를 이장하는 것은 큰 불효라 여기고 백방 으로 뛰어다니며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다. 급기야 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유일한 백작의 작위를 가진 중추원 참의 박중양을 만나게 되었다. 일면식도 없 는박중양을만나기위해10여일을그집앞에머물 다 가 겨 우 면 담 을 할 수 있 게 되었다. 그런 효심에 감동하였던지 박중양의 전화 한통화로 묘소 이장 문제가해결되었는데단서조항이있었다. 뱃사공의 집을 매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 에서는사람이살면안된다.소성공은이렇게해서 아버지의 묘소를 보존할 수 있었고,삭망일에 하루 도 빼놓지 않고 금호강과 낙동강을 건너 봉심을 해 오다1971년전답5천여평을매각하여선조를위한 재실을짓게된것이다.당시목재를나룻배로옮기 는등건축비는지금의환율로계산해도수억원을 호가할것으로짐작된다. 재실의 재호는 경소재(景素齋)라 편액하고, 산 수정(山水亭)이라 하여 외부에 걸었다. 이는 소와 처사공의문인들을위한배려인것이다. 소와처사공의 기일이 되면 고향마을 서당이 있 던 과수원을 문인들이 찾아 백일장을 열어 한시를 지었고,때론 경소재를 찾아 주옥같은 많은 시문이 태어나 경소재회운집(景素齋會韻集)과 소성문기 (小城文記)가 남겨졌다. 이는 조만간 국역으로 발 간될예정이다. 소성공은 선조의 묘원을 아카시아 나무와 칡넝 쿨을 제거하는 등 정성스럽게 가꾸어 줄 것을 당부 했다. 이에 따라 참나무 400여 그루와 잡목을 제거하고 벚꽃나무, 목련, 라일락 등 수백그루의 꽃나무를 심어 공원화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쉼터를 만들어제공해철철이많은사람들이찾게되었다. 그리고 관리사를 신축하여 누구든 찾아와 편안 히 쉬었다 갈 수 있도록 하여 경소재는 일 년에 한 번 제 사 지 내 는 시 설 이 아 닌 많 은 시 인 묵 객 이 찾 고, 주변의 주민들이 쉬었다 갈수 있는 명소가 되 어찾아오는길손을정겹게맞이한다. ▶소성박광택참봉(小城朴光澤 핫奉) 소성공은 높은 수 준의 도덕적 의무를 다한 우리 시대의 진 정한 거인(巨人)으로 추앙받고 있다. 선생 의 본관은 밀성(密 城 )으 로 고 려 말 거 유 (巨儒) 행산공(杏山 公) 휘 세균의 21세 (世)이다. 행산공은 서기 1340년경에 고 려 충혜왕 때 양효공 (良孝公) 간(幹)의 차자(次子)로서 은산 부원군 휘 영균의 제 (弟)로 태어나고, 휘 (諱)는 세균(世均)으로 중조 태사공(太師公)의 6 세손이며 벼슬이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이며 전 문형(典文衡)과 중국 元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 學士)를지내셨다. 원나라 구양현은 선생을 떠나보내며 지은 시 (詩) “송고려 박학사”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귀 국하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밀성부 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하고 시호(諡號)를 충정 (忠靖)이라 별세 후에 받아 당대의 거유(巨儒)임 을 알 수 있 다 . 아들 도은공(挑隱公,휘 文彬)과 소감공(少監公, 휘 文翊)형제가 포은(정몽주),목은(이색)등의 문 인들과 교류하였으며 목은 先生의 詩중에도 있듯 이 부자(父子) 세분이 학문이 깊었기에 가전삼학 사(家傳三學士)라 칭하였던 구절이있다. 특히 고려가 망하자 삼부자 모두가 함께 이조 개 국에참여하지않는절의정신을보였다. 도은공(挑隱公)의 현손 휘 형달(亨達)의 호 사 미정(四美亭),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학문(學 問)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儀)에 제수되었고, 또 명경(明經)으로 봉교(奉 敎)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미정공은 바로선생의15대조부이다. 선생은 학문에 뛰어나 많은 제자를 양성한 소와 처사공(素窩處士公, 휘 炳孝)과 인동 장씨(仁同張 氏)와의 사이에 3형제중 장남으로 지금의 대구광 역시 달서구 신당동에서 1901년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나고 4년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유년시절을 일제 강점기에 자랐으며, 신학문 대신 아버지로부 터한학을배우고전통유교사상을이어받았다. 그리고 한의서를 탐독(耽讀)하고 연구하여 한의 사(儒醫)가 되어 대구의 달성, 고령군 일대에서 신 망이 높은 명의로 밤이건 새벽이건 아픈 환자가 있 으면 주저하지 않고 왕진을 하고 십리, 이십리 원 근을 따지지 않고 환자를 보살피고, 약값 또한 주 면 받고 생활이 어려우면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약재상에서는 절대로 깎지 않았고 한다. 이는 사람 을 살리는 약재 값을 깎을 수 없다는 것으로 ‘신용 과양심’은한결같은선생의신조였다. 선생이 태어난 신당동에 밀성박씨 문중이 이거 하여 정착한 것은 영조 중반 1700년 후반으로 달성 구지에서 이거하였다. 예부터 이곳은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곳이나 메마른 곳이라 시집가면 고생한 다며 부모들이 딸을 시집보내기 꺼려한 동네이다. 또 ‘이 고장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간다.’는 속담을 보더라도 먹고 살기어렵다는것을알수있다. 일제 강점기 많은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근 근이 목숨을 연명한 어두운 시절 선생은 인술로서 목숨을 구하고 한편으로는 가난을 털어내기 위한 방책으로 사재를 털어 저 수지(이곡지)를확장축조 해 배 고 품 을 이 겨 내 게 하 여 그 공 적 을 기 념 하 기 위 해 주민들은 1944년 이곡 지에 ‘이곡지수리계장 박 광택 기념비’를 세워 선생 을기렸다.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기고 있다. 『구지신척 (舊池新拓, 옛 연못을 새 로 쌓아 넓히니)/ 공리홍 박(功利弘博, 공리는 넓고 크도다)/ 불유주자(不有 主 者 , 나 서 는 사 람 없 으 니)/ 기수능확(其誰能擴, 그 누가 능히 넓혔으리요)/기주이하(其主以何,그 주는 누구였던가?)/ 수지수량(誰志誰量, 누구의 의지와 아량이었던가?)/한년식도(旱年食稻,가문 해에도 이 밥을 먹으니), 영이불망(永以不忘, 길이 잊지못하리로다)』 또한 1966년 마을 주민들의 추대로 전력도입 위 원장으로추대된바주민들을설득하여 마을공동 기금을 조성하여 전기도입을 완수하는 등 향리 발 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선생의 인자하고 덕망 이 높은 것을 대구향교에서 알고 석전대제 종헌관 으로추대하여헌작하기도하였다. 해방직후집에강도가들었을때의일화는유명하 다. 돈을 다 내어주었는데도 칼을 거두지 않자 “돈 2 층에있다.”라며2층으로유인하고비상종을치며강 도야“하고외치자그때서야강도가도망갔는데이는 가족을 지키려는 용맹과 도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어준것으로도둑에게도인(仁)을베풀기도하였다. 향 시 에 합 격 하 고 서 도 과 거 에 한 번 응 시 한 후 일 본의 내정간섭과 한일합방 등의 혼란기를 격었던 아버지 소와처사공(素窩處士公)은 우리 민족의 정 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선비정신 뿐이라며 입신양 명을 멀리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서당을 열고 후 학을 길렀다. 선생은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은 효 자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고령군 다산 면 선영까지 삭망일이면 금호강, 낙동강을 나룻배 로 두 번이나 갈아타며 50년 넘게 한 번도 거르지 않아 일대 주민들도 선생의 행차를 보고 오늘이 초 하루인지보름인지알정도라전해진다. 1972년(신라기원2029년) 선생은 신라시조왕릉 제25대 참봉으로 도임하여 2년의 임기동안 박식한 학문으로 숭덕전 운영과 종친회 발전에 기여하였 으며,특히 당시 20만원의 거금을 숭덕전 수호비용 으로쾌척하기도하였다. 그 리 고 얼 마 전 5 0 년 전 어 린 아 들 의 목 숨 을 구 한 한 어머니가 모 기관지에 기고한 내용을 보면 선생 의인술(仁術)을가늠해볼수있어옮겨본다. [‘인술을 베푸신 박약국’ - 1969년 10월 어느 날 잠든 10개월짜리 재열이를 2살 된 형 기열이가 잘 못하여 깔고 앉고 말았다. 털썩 주저앉으면서 가슴 을 눌러 동생 재열이는 울지도 못하고 숨이 넘어갔 다. 재열이를 안고 박 약국에게 달려가면서도 아이 의코에숨을불어넣으며길을더듬으며가고있었 다. 이 당황한 꼴을 본 오빠 김면식이 달려와 아이 를받아안고달려갔다. 박약국님은아이를보고하는말씀이‘좀늦었으 면 큰일 날 뻔했다. 급작스럽게 가슴이 눌려, 그 충 격으로 숨이 막힌 것인데...’ 하시면서 연신 손을 놀 려 기다란 침을 준비하여 엎어 안고는 어깻죽지 편 과 등뼈사이에 침을 놓는 순간 아이는 응아~ 울음 이 터졌다. 동시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주룩 흘렀 다. 1970년 기열이가 4살 되던 해에 걸음을 잘 걷던 아이가 갑자기 걷지를 못하여 여러 날 경과를 보다 못하여 박 약국 어르신을 찾아 갔다. 말씀하시기를 ‘소아마비 초기증상인데, 초기에 와서 다행이다.’ 하시면서 다리 혈을 찾아 침 두 개를 꽂아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2,3분은 되는 것 같다. 약을 처방하 여 지 어 줄 테 니 다 려 먹 이 고 또 나 무 5 가 지 를 구 하 여 넣 고 물 을 끓 여 우 려 서 그 물 에 목 욕 도 시 키 고 , 자기전에수건을적셔다리를씻어주면효과매우 좋으리라 하셨다. 약과 나무를 받아 와서 한 열흘 치료를 했던가? 남모르게 정상적 걸음이 되었다. 나무 5가지의 이름은 무엇인지 지금은 까마귀이 나, 박 약국 어른의 처방과 치료술에 놀랐고, 고마 움에감사드립니다. 그 후 어르신에게 생명의 은인으로서 예의를 다 하여 존경해 왔습니다. 세월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어르신의 고마움을 잊지 아니합니다. 우리집 아이 가 병이 나면 언제나 약국 할아버지에게 다녀오면 신통하게 나았습니다. 약국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김기열,재열엄마김정현씀-] 선생은 많은 시문을 남겼다. 선생이 백촌 김문기 선생의 후손으로 신당동 입향조 김영호 선생과 그 의 아들 자헌대부 한성판윤 김응수를 기리는 모암 재(慕巖齋)에 참례하여 남긴 시 ‘등모암재(登慕巖 齋,모암재에올라)’가전해지고있어옮겨본다. 焚後秦書未盡灰 (분후진서미진회, 분향 후 진서 가 재가 되기 전에)/ 如今何事更圖催 (여금하사갱 도최,무엇땜에 도모하기를억제했던가?)/一天雨 露時常下(일천우로시상하,하늘에서비와이슬상 시 내리고)/ 滿地春光去復回 (만지춘광거부회, 땅 에가득한봄빛은다시왔도다) 兩隱生涯詩萬句 (양은생애시만구, 양은의 생애 에는 시가 만 구절이요)/ 小城 뜰裏酒三杯 (소성두 리주삼배, 소성의 배속에는 술이 석 잔이로다)/ 素 知世事如栽樹 (소지세사여재수, 세상일은 나무를 가꾸는 것과 같다는데)/ 愧我微根薄土偕 (괴아미 근박토해,박토에내린약한근원부끄럽게여기네) ※ 兩隱(양은), 小城(소성)은 모두 선생의 호 (號)이다. 선생은시(詩)말미에 ‘박토에 내린 약한근원 부 끄럽게 여기네’라며 일제 강점기 어두웠던 시절을 잘 표 현 하 고 있 다 . ▶맺음말 선생의 삶을 통해서 지금 시대를 통찰해 보았으 면 한다. 선생은 먼저 효(孝)를 근본으로 하였고, 인(仁)으로 세상을 밝게 밝혀나갔다. 특히 물질에 얽매이지않은점은크게본받아야할것이다. 선생이 열다섯 되던 해 어느 날 붓 장수가 찾아왔 는 데 풍 수 를 볼 줄 아 는 분이었다. 붓 장수가 아버 지에게조상의묘를잘못써서딸만낳으니고조부 묘를 성주 용암면으로 이장해야 한다고 권했다. 이 에 아버지 소와처사공(素窩處士公)은 이에 따르고 비석을마련하였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선생은 어른 셋이 들어도 힘겨운돌비석을지게에지고문을나섰다고한다. 열다섯 어린 몸으로 그 무거운 돌비석을 지고 이장 된 묘소까지 40킬로미터의 험한 산길을 그렇게 갈 수 있었던 것은 힘이 장사여서가 아니라 순전히 효 심(孝心)때문이었다. 새벽녘에 지게를 지고 고조부님 비석을 세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오가는 길에 강을 건너야 했는데 저물녘이면 뱃사 공도 없던 시절이었다. 강을 건너며 미리 뱃사공에 게 사정을 얘기하여 그 뱃사공 또한 효심(孝心)을 기특하게 여겼는지 늦은 밤까지 배를 대기하고 기 다려강을건널수있었던것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가뭄에 속수무책으로 하 늘만 쳐다봐야 하는 실정에 누구하나 엄두를 못낼 상황에 사재를 털어 저수지를 확장했다는 것은 몸 속에 애민정신 즉 인술(仁術)이 배어있었기 때문 이다. 선생의 이러한 삶 탓인지 이를 보고 자란 자 녀들또한선생의효성을그대로이어받아효자집 안에 효자가 난다는 말을 증명하며 많은 사람들로 부 터 추 앙 을 받 고 있 다 . 장남(휘 載學1925-1998)은 서울대 법학과를 졸 업하고 법무부 요직을 거쳐 헌법위원회 사무국장 을 역임하는 등 학식과 인품이 중후하였으며,차남 載誠(1929-)은 고려대 2학년 재학 중 6.25를 만나 공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여 전투기 조종사 로근무중1963년 추락사고조사를위해가다후배 조종사의 실수로 추락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12년간 38회의 전신마취하는 대 수술을 이겨 내고 공사 총동창회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 공 군사에큰족적을남겼다. 선생의 차남 재성은 사고 후 부친이 지어주신 호 ‘落生’을 天命으로 삼으며 “아버지의 공덕이 있었기 에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사회에 봉사 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리지 않았나.” 라 며 부친의 유훈에 따라 선조의 묘원과 경소재 경관 을살려많은사람들에게쉼터를제공하고있다. 그리고 선생의 손자들도 합심하여 선조님의 유 훈을 정리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어린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경소재(景素齋)와 소성공의 인술(仁術)은 계속하여 전해지리라 의심 치 않 는 다 .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경소재(景素齋)와인술(仁術)로세상을밝힌고(故)박광택前시조왕릉참봉 선조 유지를찾아븣 경소재(景素齋). 소성공께서 시조왕릉 참봉으로 숭덕전에서촬영한사진이다. 신당동유래비와소성공기념비(左), 면장김영기영세불망비(右)가있다. 김면장은소성공의아버지소와공의제자다. 이외에 도면장을역임한분이다수배출되었다. 기념비-택지개발로 대구 달서구 와룡 공원으로 옮 겨져있다. 선생이남긴소성문기와아버지소와공의제자들이남긴시를 모은경소재회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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