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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출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일강(一江) 김철(金澈) (1886.10.15~1934.6.29) 김철은 1886년 10월 15일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다. 경성법률전수학교를 거쳐,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집안의 소작인들에게 농토를 나누어 주고 노비들을 풀어주었다. 고향에 은거하던 중 조선총독부의 협력해 달라는 회유와 협박을 뿌리치고, 1917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잠시 귀국하여 3·1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천석군이었던 가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군무장·재무장·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후 임시정부를 항저우로 옮기고, 그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로 인한 과로와 급성 폐렴으로 항저우 광자병원에서 49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으며, 송병조·양기탁·이시영·조완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애도 속에 항저우 악비묘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이곳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묘소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철을 기리기 위해 1975년 8월 전남 함평군 신광면 구봉산 기슭에 숭모비를 세웠고, 1984년 서거 50주기를 맞이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003년 6월에는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1900.7.13~1993.1.7) 백강 조경한 조경한은 1900년 7월 13일 전남 승주군 주암면(현재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한동마을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배달청년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동북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참여하여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34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개설되자 교관에 임명되어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민족주의 진영의 정당·단체들이 연합해 결성한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에 참가하였다. 1940년 5월 충칭에서 민족진영의 정당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데 기여하였다.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총사령부 주계장에 임명되어 광복군의 살림을 맡았다. 1943년 3월 국무위원회 부비서장에 임명되었다가, 1944년 2월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3월 충칭 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전당대회에서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에 지명되어 조직책임을 수행 하였다. 10월에는 국무원에서 국내 진입을 위해 국내공작위원회를 구성할 때 위원에 임명되었다. 조국 광복 후,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64년 9월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장을 맡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93년 1월 7일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2009년에는 조경한 선생 현충시설 건립추진위원회에서 순천시 금당 공원에 기념비를 세워 고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