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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와 백화마을 1946년 보성을 떠난 김구가 도착한 곳은 광주였다. 대성초등학교에서 '김구선생환영기념강연회'가 열렸다. 당시 광주시장인 서민호씨가 환영 인사를 하면서 귀국동포전재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자, 김구는 그동안 여러 곳에서 성금으로 받은 선물 해산물·육산물·금품 등을 모두 전재민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기증했다. 당시 귀국동포 전재민들은 1920 ~30년대 광주천 정비사업으로 학동 8거리 일대에 조성된 갱생촌에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독립운동가인 서민호 광주시장은 김구의 회사금을 종잣돈 삼아 갱생촌 850평의 대지에 4~4.5평의 작은 건물 100여 가구를 세워 전재민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에 김구는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백화마을'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딸린 남루한 집이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으며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옆집에서 소곤대는 귀엣말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전재민촌이 한 지붕 아래 여섯 가구가 마치 마구간처럼 나란히 이어졌다며 '말집'이라 불렀다. 김구는 지방순시를 다닐 때마다 받은 돈과 물품을 그곳의 전재민을 위해 기탁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전재민에 대한 김구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1948년 광주 방문 김구가 광주를 다시 찾은 것은 1948년 10월 1일이었다. 당시 남북한은 서로 다른 체제의 정부를 수립한 직후였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김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남북의 갈등이 시작되던 때였다. 김구는 10월 1일 광주극장에서 열린 전남 '삼균주의청년단' 개소식에 참석해 분단과 남북한의 대립을 규탄하며 평화통일을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