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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 신탁통치를 막아내고 자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문제도 중요하였지만,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막아내는 일도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소가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면서 국토는 분단되고 말았다. 여기에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 민족마저 분단될 상황이었다.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미·소간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신탁통치는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한국문제는 UN으로 넘어갔다. UN은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UN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UN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절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김구는 남이 그어놓은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각각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국토와 민족이 분단될 뿐만 아니라, 남북의 형제자매가 서로 총칼로 대결하는 민족의 상잔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며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자며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구는 충칭시기에 좌우연합정부를 실현한 경험이 있었다. 북측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는 평양에서 남북의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남북한 모두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고 절규하였다. 회의를 통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결정서·공동성명서 등이 채택되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남쪽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북쪽에서는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었다. 이로써 국토와 민족은 분단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