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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9년 만에 두 손자를 데리고 자싱으로 찾아오셨다. 당시 김구는 피신하는 몸이라, 어머니를 모실 수 없었다. 가정을 돌보지 못하였지만, 그런 아들에게 한 번도 탓을 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이 잘못한다고 생각할 때 종아리를 때리셨다. 김구는 환갑이 될 무렵까지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았다. 난징에서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청년단과 동지들이 돈을 모아 생일상을 차리려 하였다. 어머니는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시고, 도리어 돈을 보태어 권총을 사서 청년단에 하사하였다. 어머니는 임시정부와 함께 자싱·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 등지로 옮겨 다니며, 임시정부 가족들 사이에서 어른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인후염으로 1939년 4월 충칭에서 돌아가셨다. 김구가 일본인 쓰치다를 죽이고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을 때, 어머니는 부잣집 동자꾼으로 일하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바가지에 밥을 얻어다 먹였다. 옳은 일하라며 자신을 따라 가시밭길을 걸었던 어머니를 평생 기억하기 위해 그 모습을 동상으로 제작하였지만,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동상은 1949년 8월 조각가 박승구가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