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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바친 민족의 지도자 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김순영과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다. 김자점의 역모로 선대는 황해도에 은거하였고, 이후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살았다. 신분차별을 깨닫고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지만, 부정과 비리가 만연한 현실 때문에 꿈을 접었다. '양반 상놈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에 동학에 입도하여, 팔봉접주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일으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안태훈의 집에서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유학을 배웠다. 평생 고능선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되자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에 가담하고,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맨주먹으로 처단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보복이었다.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다가 탈옥하여 전라도 등지로 피신하였고, 공주 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환속 후 황해도에서 학교 설립·강연회 등 교육활동과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신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안악사건. 105인사건' 등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여 수립된 독립운동의 총 지도기관이다. 경무국장에 이어 내무총장·국무령, 그리고 행정 수반인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상하이·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결행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미국·영국 등 연합군과 함께 공동작전을 추진하였다. 장제스를 통해 카이로 회의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해방 후 환국하여 자주 독립국가 건설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미·소 양군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면서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자주 독립국가 건설과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49년 6월 26일 반민족행위자들과 반통일 세력의 흉탄에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