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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벌어졌고, 그 때마다 한신의 사례가 언급되거나 권력자의 비정한 폭력을 비판하는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것이 역사의 힘이다. 역사는 또 그 자체로 뒤끝이다. 이 역시 역사적 팩트 두 가지를 들어 설명해보자. 송나라 때 명장 악비는 백성들의 군대 지원과 성금으로 이루어진 악가군을 이끌며 절망적이었던 금나라와의 전쟁을 기사회생시켰다. 악비는 구국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도하던 기회주의자 진회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황제 고종을 부추 겼다. 금나라에 대해 강경책으로 나가 다가는 금나라가 포로로 잡혀 있는 흠종을 돌려보낼 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악비의 군권이 이렇게 커지다가는 자칫 쿠데타 세력이 될 지도 모른다는 협박을 동원했다.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고종은 간신 진회와 손을 잡고 악비의 군권을 박탈하고 ‘혹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막수유(莫須有)’의 죄목을 뒤집어씌워 처형했다. 송나라는 금나라의 속국이 되어 매년 어마어마한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진회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민중과 역사는 그의 죄악을 잊지 결코 않았다. 진회가 죽자 악비는 명예를 회복했고, 진회에게는 그 책임을 물어 간신이란 낙인을 찍고 철로 그의 상을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렸다. 진회는 악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영원히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진회와 정반대되는 사례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춘추시대 정나라의 정치가 정자산은 스무 살 약관의 나이에 정치를 시작하여 40년 가까이 강대국 틈에 끼인 정나라를 작지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정치 경력 40년 중 20년은 정나라의 명실상부한 실세로 내・외정을 주도했다. 백성들의 여론을 국정의 중심에 놓았고, 백성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해 성문법을 제정하여 공표했다. 기득권 귀족 세력들의 극렬한 반발 (실제로 그 아버지가 이들의 무력 저항에 살해당했다)에 정자산은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생사를 그 일과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듣기에 좋은 일을 하려면 그 법도 함께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며 단호히 물리쳤다. 정자산은 고위 공직자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높은 자리와 재산은 그 자신을 비호하는 수단이 된다. 배운 다음(인간이 된 다음) 비로소 관직을 맡을 수 있다고 들었지, 관직을 맡은 다음 공부한다는(인간이 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일갈했다. 성문법 제정에 이웃 나라 귀족까지 나서 정자산을 비난하자 자산은 “(법의 제정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저 세상의 이치를 돌이켜보고자 할 뿐이다. 세상 이치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내가 제정한 성문법이다”라는 말로 대응했다. 정자산이 죽자 백성들은 이제 누구를 믿고 사느냐며 통곡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죽자 집에 장례를 치를 37 돈이 없어 자식들이 시신을 광주리에 담아 그냥 산에 묻고 돌아왔다는 것이 다. 이를 안 백성들이 돈이며 패물을 가지고 와서 제대로 장례를 치르자고 했으나 자손들은 이를 거절했다. 백성들은 돈이며 패물을 자손의 집 앞을 흐르는 시내에 던졌고, 시냇물은 오색으로 빛났다. 이 시내가 지금도 하남성 정주시 시내 중심으로 흐르는 금수하이다. 정자산의 고귀한 삶과 죽음은 지금도 금수하를 따라 흐르며 사람들을 감동 시키고 반성하게 한다. 진회는 자신이 죽인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추악한 그 삶과 죽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알고 배우고 통찰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나 자신의 삶의 흔적에 어떤 형태로든 간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죽음과 평가에까지 영향을 미쳐 언제 어디서든 수시로 나를 공소시효 없는 역사의 법정으로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간신 진회처럼 말이다. 역사는 그 자체로 뒤끝이며, 그래서 무섭다. 악비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