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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95 당할 걸세.” 이 보안과장은 그때까지 화가 풀리지 않은 듯 횡하니 나가 버렸 다. 차일혁은 자신의 참을성 없는 불같은 성질은 필생의 과오라 여겼지만 고치겠다는 결심은 별로 하지 않았다. 3월 10일. 도청 앞 광장에서 최석용 전투사령관의 격려사를 들 으며, 18대대는 30대의 트럭을 배차 받아 당시 도내에서 치안이 가장 위태로운 고창으로 출동하였다. 차일혁은 고창에 도착하여 부대대장과 함께 작전계획을 수립하 는 한편, 수색대를 공비들의 준동이 심한 지역에 투입하였다. 인 공시절 치안대원 출신들로 이루어진 수색대는 따발총, 인민군 모 자, 기마복 등으로 빨치산을 가장하여 적의 동태를 탐색하였다. 그들은 일부 대원들의 미움을 받았지만 더욱 열심히 일했으므로 쓸모 있는 대원들이었다. 수색대는 몇 시간 만에 자기편으로 오인 하여 접근한 빨치산 4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차일혁은 이들을 심문한 결과, 주력군은 동쪽으로 빠지고 심원 면과 상하면, 해리면에 접해있는 연화봉에 전북도당 정치보위부장 이며 노동당중앙위원인 김 某가 왜가리부대, 기포병단, 번개병단 을 지휘, 포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왜가리부대는 목소리가 왜가리를 닮았다는 박 某 가 대장이며, 기포병단은 이 某, 번개군 단은 백 某 돌진대장이라 일컫는 자가 있었다. 1․4후퇴시 15청년 방위대 소속 대원 수십여 명이 집단으로 탈영하여 빨치산으로 입 산한 사실도 알아냈다. 전략적 요충지인 심원면과 상하면, 해리면, 무장면에 포진한 적 의 수는 약 500명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연화봉은 변산반도와 경수산의 중간에 위치한 봉우리로 서해안 41) 대부분이 일경 출신인 상사 및 동료들과의 이러한 일로 인한 갈등은 향후 차일혁의 경찰인생에 고초를 겪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