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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87 기 때문에 중앙에서도 이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었다. 치안책임 자의 문책과 전남북 군사령관에게 탈환 회복하라는 특명까지 있 었던 만큼 칠보발전소의 탈환여부는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곳 이었다. 2월 17일. 독고봉을 완전 점령한 후 차일혁 부대는 계속해서 미 수복지인 정읍군 산외면에 진격하여 그 곳을 완전 복구시켜 지서 와 면 행정기구가 비로소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어서 일 주일 동안 산내면 지서 관할 능교리 뒷산에 본거를 둔 도당직속의 카추샤병단, 번개병단38) 을 계속 추격, 격멸하여 산내면을 탈환하 였다. 그때까지의 전과는 대략 적 사살 72명, 생포 23명이었고, 무 기노획은 소련식 기관포 1문, 소련식 장총 2정 외 총기 10정, 일본 도 3개, 사이드카 1대, 박격포탄 7발, 사제수류탄 2발이었다. 아군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6명이었는데 전사자 중에는 적진 1백 미터 앞까지 돌진하다 쓰러진 권홍문 경위가 있었다. 누구보다 열 심히 분전한 권경위는 산내면이 고향인데, 수복을 못 보고 그만 눈을 감은 것이다. 발전소를 확보한 후 시설을 살펴보니 적은 취수로를 짚단으로 차단하고 모터와 터빈을 파괴하여 놓았다. 중앙청 전기국에서 온 기사 한명과 전업회사 기술자들과 함께 복구공사에 착수하였다. 워낙 엄동설한인데다 산간벽지인지라 인부조차 마음대로 구하지 못해 대원들이 옷 벗고 물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닥불 을 피워놓고 물 속에 들어가 취수로에 박혀있는 짚단을 빼내다가 잠시 나와 불을 쬐곤 다시 들어가 취수로에 박혀있는 짚단을 빼내 는 작업을 반복하였다. 살이 얼어 터지고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지 면서 노력한 끝에 취수구를 복구하였다. 마침내 송전할 수 있게 38) 1개 병단은 대략 200~300명으로 구성되며, 그 부대지휘관의 취향이나 성향을 따라서 이름이 지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