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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77 학도병36)이 실탄이 떨어져 전투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식사조 차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칠보발전소와 칠보지서의 함락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식이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발전소와 지서를 탈환하고 죽음 직전의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서 18대대의 출동을 요청한다고 경비계장 정순식 경감이 침통한 좌중의 침묵 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전투를 하기 위한 전투부대인 만큼 전투를 위한 출동은 당연한 일이나, 선결문제는 부대수송용 차량이니 배차만 해주면 지금 곧 출동하겠습니다.” 처녀출동인 구이작전의 승리로 차일혁에겐 적과 다시 한번 맞 서 싸울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군이 천안에 왔네, 대전에 임박했네.” 하는 헛소문으로 민심은 극도로 불안해졌고 부유층과 권력층들이 피난 짐을 나르느라 대부분의 차량이 피난행렬에 들 어섰기 때문에 공비토벌을 위한 차량동원이 용이치 않았다. 그렇 다고 출동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북도경의 쓰리쿼터 37) 3대, 김제경찰서 트럭 2대, 마침 치안국 에서 온 차 1대 등 겨우 5대를 배차 받아 차일혁은 부대를 이동하 기로 하였다. 1951년 1월 13일. 차일혁은 5대의 차에 불과 105명의 대원과 중 화기를 싣고 칠보발전소로 출정했다. 부상당한 김규수 대신 안균섭 (安均燮) 중위를 따라갔던 최순경(崔順庚)이 보신병으로 들어왔다. 음력 섣달의 어스름한 초승달빛 아래 영하 9도의 추위, 쌩쌩 몰 고도 하였다. 당시 대학중퇴자, 우익진영 전쟁피해자의 유자녀, 국군 유격부대원 등 이 전투경찰로 임명되었다. 36) 6・25 전쟁 당시 북한공산군의 남침에 맞서 애국학생들이 자진하여 전쟁에 참가한 학 도의용군을 말함. 37) 무게가 3/4톤이라 쓰리쿼터라고 불렸는데, 야전용 짚차로 지붕이 없는 무개형 차량이 며, 주로 지휘용 짚차로 이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