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page

2부. 역사의 부름 앞에 75 대원들의 식사 역시 주먹밥 따위로 겨우 주림을 면할 정도였다. 복장 또한 제각각으로, 보온조차 안 되는 남루한 것이었다. 그러 나 연일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대원들의 열성만은 추운 엄동설한 에도 괴뢰군의 침략을 단번에 쳐부술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특히 인민군에게 부모를 잃은 유자녀로 자원입대한 나이 어린 대원들 을 이끌어갈 마땅한 대장이 필요하다고 느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고심하던 차일혁은 문득 이한섭을 떠올렸다. 이한섭은 차일혁 친구의 동생이었다. 그는 대동아전쟁 때 미얀마전선에서 일본군 조교를 지내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다. 귀국 후 그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문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대학에 다니던 중 6·25를 맞아 집에 내려와 있었다. 차일혁은 그를 찾아가 차일 혁 부대에 들어오라고 제의하였다. 그의 형은 혹 부상이라도 당할 까 군대에도 안 보내고 있었는데, 차일혁이 나타나 전투경찰에 들 어오라고 하자 내심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이한섭은 기꺼이 따 라나섰지만 그의 형은 그가 다치지 않게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 하였다. 차일혁은 이한섭을 경사로 특채하여 그에게 유자녀 40명을 맡 겼다. 모두 열일곱, 열여덟살의 나이였으므로 옛 화랑의 이름을 따서 화랑소대라 부르기로 하고 그에게 훈련을 맡겼다. 온갖 고통 과 전투경찰에 대한 소홀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의 전투의 식과 멸적의식은 갈수록 고양되고 전투기술도 향상되었다. 김 某 17대대장은 경찰에서도 유달리 빨치산에 대한 원한이 깊 었다. 그의 어머니와 제수, 누이 등 일가족 다섯 명이 경찰의 가족 이라 하여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학살당했기 때문에 그의 증오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원래가 온순하고 쾌활한 사람이었지만 가족들 이 참변을 당한 후 우울하고 무거운 성격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