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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74 ❚칠보발전소를 탈환하다 1951년 1・4후퇴로 서울을 중공군에게 다시 내어주고 아군은 후 퇴하기 시작했다. 처녀작전을 끝내고 오랜만에 신정휴가 겸 집에 서 며칠 쉬었지만 차일혁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좁은 집에 친척 들이 몰려들어 대여섯 개의 방에 사오십 명이 북적대고 있었다. 친척들 중에는 인공시절 부역한 사람도 있어 그것이 탄로날까봐 차일혁의 집에 피난 와있던 것이다. 빨치산 토벌대장의 집에 좌우 익이 함께 기거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차일혁과 부인은 그들을 내 치지 않고 함께 살았다. 서울을 포기한다는 비보에 이어 남한 일대는 곧 중공군이 밀어 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민심은 물 끓듯 했다. 미리 겁을 집어 먹고 봇짐을 싸서 차에 싣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하는 자들의 행렬 이 줄을 이었다. 하루가 무섭게 치솟던 쌀값은 폭락하기 시작했고 시장에는 귀금속과 고급사치품이 쏟아져 나왔다. 금력과 권력 있 는 층이 먼저 피난길에 오르자 민간에서도 작년처럼 남한일대가 인공치하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거듭할수록 불리하게 들려오는 전황뉴스와 더불어 각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발호(跋扈)는 날이 갈수록 그 도가 심해졌다. 차일혁은 아내가 차려온 밥상을 받았다. 언제나 처럼 무밥이었 다. 무를 채 썰어 쌀과 함께 끓인 것이다. 김치는 무밥이 싱겁지 않도록 양념처럼 비벼먹을 수 있을 만큼 두 쪽 정도는 놓여 있었 다. 무밥이 아닐 때는 시래기밥이었다. 삼성제사소에서 말린 시래 기를 얻어다가 쌀과 함께 끓여 먹었다. 그리 많지도 않은 경감 월 급에 사오십 명의 가족을 부양하자면 연명하는 것만으로도 다행 이었다. 차일혁은 묵묵히 무밥을 먹었다. 가족과 함께 무밥이나마 먹어 본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하는 상념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