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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70 경찰들 중에는 빨치산에 대한 원한이 유달리 깊은 사람이 있었 다. 김 某 17대대장은 어머니와 제수, 누이 등 일가족 다섯 명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학살당했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빨치산에 대 한 원한이 깊었다. 또 손 某 정읍경찰서장은 인민군에 의해 목이 잘려진 채 국군이 수복할 때까지 잘린 목이 경찰서 앞에 걸려 있 었다. 그래서 정읍에서 부역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인민군과 빨치산들은 경찰이나 그 가족을 만 나면 죽이려 했고, 경찰 역시 그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불타 올랐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차일혁은 계속 이 런 일이 되풀이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살상이 끝날 수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서로 전투를 하는 상대이거나 기어이 죽겠다고 발악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것을 덮어주고 동포로서 따뜻이 감싸주고 싶었다. 부대가 구이면에서 철수한다고 하자 차일혁에게 총을 쏜 자가 차일혁에게 달려왔다. 이곳에 있어봤자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 을 것 같으니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차일혁은 그가 자신의 왼 팔을 못 쓰게 만든 자였지만, 그를 전주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다음날 그를 김규수 경사의 육촌동생이라 소개하여, 취사반에 배 속시켰다. 차일혁은 첫 전투인 구이작전의 결과를 놓고 부하들과 면밀히 검토하고 평가해 보았다. 어두울 때 적의 기습을 받았으므로 아군 의 총탄 소비가 심했고, 반면, 적도 중화기나 기관총으로 쏘지 않 은 것으로 보아 그들의 무기도 소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동 다릿골에는 바위가 많아 엄폐하기가 좋았는데 그 것이 인명피해를 줄이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이다. 차일혁 은 생각했다. “유격전에는 나무 한 뿌리, 바위 하나에도 승패가 좌우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