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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53 주소도 군번도 몰랐다. 적의 총탄에 쓰러진 전우들을 영광스럽게 상신(上申)시킬 수도, 가족들에게 알려줄 수도 없었다. 차일혁과 살아남은 대원들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전우 의 명복을 빌며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투경찰에 입문하다 수복 후 차일혁은 행정이 복구될 때까지 임시로 유엔군 제2사단 전주시 치안대장에 임명되었다. 군대는 한쪽 팔의 부상으로 부득 이 제대했다. 아군은 남한 전역을 완전히 수복하고 승승장구 북진 하여 전 민족의 숙원인 실지 회복에 이르렀다. 군에서는 제대했지 만 대신 차일혁은 오랫동안 공산당의 학정에 유린된 북한지구에 가서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11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린 아군은 다시 후퇴하게 되고 차일혁의 구상은 어 이없이 깨져 버렸다. 인민군들과 그 동조세력이 지리산, 회문산, 내장산 등으로 숨어 들자 국군을 보조하여 이들을 토벌할 전투경찰대의 증설이 요구 되었다. 전북도경에서도 전투경찰대의 신설을 위해 사람을 찾고 있었다. 중국 항일전선에서의 동지였던 최석용 전북지구 전투사령 관과 이우식 법원장 등 지방유지들이 차일혁에게 전투경찰에 입 문할 것을 권유해왔다. 그는 백척간두에 놓인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경찰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50년 12월 10일, 차일혁은 전영진 인사계장의 안내로 김가전 전북지사, 김의택 도경국장 겸 경비사령관, 그리고 새로 전북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부임해 온 최석용(崔錫傭) 대령을 만나게 되었다. 김가전 지사는 내무부장관을 대신하여 임 경감의 사령장을, 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