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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38 미군정의 수배를 받는다. 그는 수배망을 피해 서울에서 전주로 내 려온다. 전주에 내려온 차일혁은 구평창(舊平創) 삼성제사에 경비 주임으로 들어갔다. 공장은 남로당원들의 침투로 파업이 빈번했 고, 경비주임인 차일혁은 직책상 그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차일혁은 몇 번 그들의 파업을 막다가 적색 테러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 공로로 노무과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차일혁은 연일 계속되는 좌우대립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1949년 12월에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오늘날 향토예비군과 같은 호국군이 폐지되고 청년방위대가 새로 조직되었다. 대한청년단과 호국군 간부들이 주축이 된 청년방위대는 전국적으로 20만 대원 을 확보하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유사시 향토방위를 담당하였다. 호국군 대대장으로 보직하였던 차일혁은 전주시 중앙동에 본부를 둔 15청년방위대 총무처장에 선임되었다. 차일혁은 자신의 몸에 흐르는 무인의 피를 결코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광복된 조국에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중 국중앙군관학교 선배인 황민의 만류와 당시 45년 말 미군정의 포 고령을 어기고 일본인 형사를 저격하여 경찰의 수배망을 피해야 했던 이유로 육사에 들어갈 수 없었다. 중국에서의 항일전선 시절에 이어 다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 지만 청년방위군은 말뿐, 시설과 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복 장도 통일되지 않은 대원들과 목총으로 훈련을 쌓아나갔다. ❚6・25전쟁 발발과 옹골연 유격대 활동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26) 동족상잔 비극의 막이 오른 26) 본문은 김규수의‘옹골연부대’16~21쪽과‘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33~35쪽 의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