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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37 다. 그는 다른 이념은 받아들이지 않은 채 끝까지 민족주의자로 남았고, 해방정국에서 차일혁도 그와 유사한 행보를 걸었다. 그는 김지강과 함께 모종의 거사에 가담한다. 사이가(齊加七)라 는 종로경찰서 미와(三輪) 경부 이후 가장 악명 높은 일경 간부가 있었는데, 해방 이후에도 미 군정의 비호 하에 당시에 우후죽순처 럼 새로 생기는 각종 조직을 사찰하고 다니면서 “까불지 마라”, “쏜다“라고 위협하고 능글맞게 경찰행세를 한 자가 있었다. 해방 직후의 혼란 중에도 신흥 정당, 단체의 연락처를 직접 찾아다니며 압력을 가하는 방약무인한 행동을 하여 당시 정가의 격분을 자아 내게 하던 자였다. 22) 1945년 11월 2일 일제경찰 간부 사이가(齊加 七)를 저격하는 일에 참여한다. 23) 당시 신문에는 차이혁(車利革)란 이름으로 나왔는데, 이는 차일혁(車一赫)의 이명으로 추정된다. 김 지강 선생이 앞장서고 이규창, 차일혁 등 4명이 원남동으로 향했 다. 24) 사이가(齊加七)는 집이 원남동에 있었는데, 가족은 이미 일 본으로 다 건너가고 자기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사이가를 아 는 대원이 불 꺼진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불이 환히 켜졌다. 사이 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대원은 그를 원남동 사거리 건너편에 있는 원남우체국 옆 골목으로 유인해냈다. 그곳에 사이가가 잘 아는 일 본인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앞에 이르렀을 때 네 사람은 그를 권 총으로 저격하여 사살했다. 김지강 일행은 또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형사주임 미와(三輪)를 저격한 것으로 알려졌고, 차일혁도 이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25) 미군정의 포고령을 어기고 일경을 처단하였기 때문에 차일혁은 22)‘해방3년사:1945~1948', 42쪽, 송남헌. 1985, 23) 자유신문, 1945. 11. 2. 24) 이날 거사에 가담했던 김지강 등과 차일혁은 9년 후 서전사 수사사찰과장으로 재직할 때인 1954년 8월 남원 광한루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25) 유족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