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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36 차일혁은 혼자서라도 조국 땅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조국 을 지척에 두고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동지 들을 뒤로 한 채 조선의용군 무리에서 벗어나 개인자격으로 압록 강을 건넜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45년 9월경이었다. 그는 해주에 들러 김지강 선생을 뵈었다. 8년 동안의 감옥살이를 하느 라 지강 선생의 얼굴은 매우 초췌했으나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 다. 그들은 감격의 포옹을 했다. 사람은 자기의 역할모델(Role Model)을 잘 만나고 선택을 해야 한다. 차일혁이 그의 역할모델로 서 김지강을 택한 것은 그의 행운이었다. 그의 추천으로 중앙군관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광복 이후 같이 있던 조선의용군 전원이 북 한군이 되었는데 오로지 차일혁 만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나라 대한민국을 선택하게 된 것은 그의 정신적인 스승 김지강 때 문이기도 하였다.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으나,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 스 같은 신세였다.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 죽는 날만 받아놓았던 친일세력은 미군정하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활개 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딜 가나 좌우 이념대립의 갈등과 혼란뿐이었다. 혼미한 남한 정국은 중국에서 온 조선의용군 출신의 차일혁을 받아줄 곳 이 없었다. 일제 36년간의 압제에서 벗어났지만 조선의 시련은 아 직 끝나지 않아보였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광복과 함께 귀국했으 나, 이념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조국에서 또 다른 시련을 맞 이했다. 그들은 북쪽과 남쪽 중에 한 곳을 선택해야하는 처지였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북쪽을 선택하여 갔고, 그의 고향후배이자 의열단 단원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차일혁이 스승으로 모신 김지강은 남쪽을 선택했다. 김지강은 아직 조선 땅에 남은 악질 일본인들을 처단하는 한편, 신탁통치 반대운동에도 열렬히 참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