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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30 개하였는데, 무장한 채로 중국군민·일본군·조선인을 대상으로 항 일을 선전하거나 일본군 점령지역에 들어가 조선인을 조직했으며 아울러 일본 패망 후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힘써 양성하였 다. 차일혁은 제1대 소속으로 태항군구 5분구 지역인 안양(安陽), 자현(磁縣), 임북(林北)에서 활동했다. 1942년 2월부터 일본군은 태항산 일대를 포위하고 대대적인 공 격을 감행하여 조선의용대는 이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동원 된 일본군의 병력은 4만 명에 이르렀고, 5월에는 20개 사단 약 40 만 명을 투입하였는데 전차와 항공기까지 동원했다. 이 전투에서 윤세주19)가 전사하는 등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중국전선에 투입되었던 일본군 중 학병으로 끌려왔던 조선인 병사들이 탈출하여 태항산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용 대는 이들을 교육시키면서 첩자를 가려내야 했는데 그 와중에 전 개된 정풍운동(整風運動) 20) 은 태항산에 있는 조선인들의 파벌형성 을 가속화한다. 당시 조선인 전사들은 공산주의파와 자유주의파로 나눠져 있었다. 사회주의 쪽으로 유도하는 학습내용은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던 전사들의 염증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차 일혁이 중국이나 북한으로 가지 않고 서울로 온 것을 볼 때 그는 자유주의파에 속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패망의 색이 짙던 일본이 결국 조기에 항복함으로써 태항 산의 조선의용군 21) 도 조국을 향해 전진하게 된다. 이들은 1945년 19) 독립운동가. 의열단과 민족혁명당의 간부로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이동한 정 치위원이다. 19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20) 1940년대 중국 연안에서 벌어졌던 정치 문화운동으로 3년간 지속되었다. 이 운동의 모토는‘주관주의’,‘종파주의’,‘형식주의’등 잘못된 3개의 풍조를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21) 1942년 7월 조직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의 군사조직. 1941년 1월경 태항산(太行山)에서 김두봉(金枓捧)ㆍ최창익(崔昌益)ㆍ한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