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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항일독립운동 29 버리고 조선의용대 신병으로 입대한다. 그는 조선의용대 제3지 대 12) (지대장 박효삼) 제9전구 소속의 신병이 되어 일본군과 전투 를 벌이며 화북으로 함께 이동한다. 화북은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그의 전우들 중에는 제1지 대에 속했던 김학철(소설가)이 있었고, 군관학교 선배였던 김승 곤 13) (전 광복회14) 회장)과 그의 사촌형 김일곤(문명철) 15) 등이 있 었다. 특히 김일곤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선의용대 시절 차일혁 은 車轍 16) 또는 아명이었던 車鏞徹17) 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낙양에 집결한 조선의용대와 차일혁은 1941년 4월 황하를 무사 히 도강하여 친일 황정위부대의 봉쇄선을 지나 국민당 지역인 임 현에 주둔했다. 계속 북상하여 7월 마침내 태항산18) 동쪽인 하북 성 경광선에 안착했다. 태항산에 도착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현 지 조선인과 합세하여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 성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호가장 전투에서 패배하여 이후 태항산 중 깊숙이 이동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장선전활동을 활발히 전 12) 1지대는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혼성부대였고, 2지대는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었으 며, 차일혁이 속했던 3지대는 민족주의자들로만 구성되었다. 13)‘황민’이란 이름으로 활동.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하여 제1구대를 이끌고 호남성 장사(長沙)의 중국 제9전구지역에 도착, 제1차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 으며, 그 후 구룡산(九龍山)과 오동산(梧桐山) 전투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 과를 올리며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43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 무위원회 비서로 근무하였고, 같은 해 12월 광복군(光復軍)에 입대하였다. 1944년에 는 광복군 제1지대본부 부관주임 겸 본부구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6월 총사 령부 정훈처 선전과에서 근무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 수여되었다. 14) 국권 강탈 이후부터 8ㆍ15 광복까지 활동한 독립 유공자 및 그 유족들이 조직한 단 체. 순국자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한 사업을 주로 했다. 15) 전남 담양 출신으로서 민족혁명당 당원. 1943년 4월 14일 태항산 진서북지구 전투에 서 전사했다. 16)‘조선의용군 연구’ 90쪽,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염인호, 1994. 17) 「재지불영선인단체조직계통표(在支不逞鮮人團體組織系統表)」,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월 재인용 18) 중국 하북성과 산서성의 경계지대에 있는 산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