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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28 군사조직을 만들기 위해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중국 의 지원을 받아 낙양 등에 군사학교를 설치하고 졸업생들을 주축 으로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광복군을 창설한다.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등의 조선인 군대는 중국군에 배속되어 항일전선에서 일 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차일혁도 중국중앙군관학교(낙양분교 추정)를 졸업한 후 중국군 으로 복무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1940년 7월 그는 중앙군 제1전구 32사단의 포병중대장으로 진급하여 중대를 이끌 고 항일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당시 장개석은 조선인 부대에 대하여 여러 지원을 하였지만, 간 섭도 함께 했다. 조선인 부대는 전투나 작전 뿐 아니라 물자에 대 해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국군은 그들에게 후방교란, 삐라 살포 등의 선전활동에 치중시켰는데, 이는 일본군과 대대적인 전 투를 벌이며 자유롭게 군대를 이동하고 작전을 펴고 싶었던 조선 인 전사들의 불만을 샀다. 중국의 항일전선에서 중국군에 배속되 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수많은 조선인 젊은이들은 조선 동포 들이 많이 살고 있는 화북과 동북지역으로 이동하기를 바랐으며, 특히 120~300만까지 추정되는 한인들이 살고 있는 동북지역(만 주)으로 진출 한 후, 동포들의 지원 아래 그곳 항일무장세력과 연 합하여 국내 진공을 할 수 있기를 강하게 열망하고 있었다. 그들 은 하루빨리 조선에 있는 일본군과 전쟁하여 조국의 독립을 쟁취 하고 싶어 했다. 차일혁도 그런 열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중국군 장교 로 복무했지만 조선인으로 조선인 군대에 속해 맘껏 일본군과 전 투를 벌이고 싶었다. 1941년 3월 그는 커다란 결심을 한다. 당시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중국군의 눈을 피해 조선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화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과감히 중국군 장교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