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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항일독립운동 27 김지강은 1937년 1월 17일 상해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항일무장투쟁전선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침략을 개시했다. 중일전쟁 발발로 광활한 중국대륙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곳곳에 전선이 형성된다. 일본군은 10월에는 광동과 무한을 점령하였고, 12월에는 남경을 침략하여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남경학살 때 죽은 사람은 30만 명이 넘었다. 전 쟁의 포화 속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항일 무장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김원봉은 중국으로 망명해있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모아 조직적 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였다. 그는 장 개석의 지원 아래 강서성 성자현에 있는 중국중앙군관학교 성자 분교에 한인 특별반10) 을 개설하여 장차 조선인 군대를 조직하고 자 했다. 1938년 10월 10일 성자분교 졸업생들을 주축으로 조선의 용대 11) 를 창립한다. 김구도 일찌감치 조선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10) 중국 관내지방에서 최대 항일세력이었던 민족혁명당은 조선청년들에게 항일운동에 참 가할 것을 호소하였고 그 결과 83명의 청년들이 민혁당 본부가 있는 남경에 모였다. 민혁당은 중국 당국과 협상하여 이 청년들을 1937년 12월 중국중앙군관학교 성자분교 에 입교시켜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11)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임시수도 한구(漢口)에서 창립된 독립무장부대로 구성원은 약 200명이다.‘식민지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동포를 규합하고 파시스트군벌의 압제하에 있는 모든 민중을 연합, 일본군벌을 타도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완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최초의 편제는 2구대(區隊)로 편성, 제1구대는 대장 박효삼 이 지휘하여 호남(湖南), 강서(江西)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제2구대는 이익봉이 지 휘, 안휘(安徽)와 낙양(洛陽)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전투, 일본군정의 탐지 또는 점령지역내의 정보수집, 일본인 포로취조 및 사상공작, 일본군대에 대한 선전공작, 중국군대 및 민중에 대한 선전공작, 적문서의 번역 등 다양하였다. 1941년 3월초에는 북경, 청도, 상해 등지에 무장정치공작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일부가 화 북으로 올라가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함께 전투를 했고, 북상하지 않은 무리는 1942년 5월 광복군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