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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24 ❚상해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들 차일혁은 처가의 소개로 상해의 한 금융회사에 근무하게 되었 다. 말 한마디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식민지 조선 땅에서 벗어나 사내의 포부를 펼칠 수 있는 넓은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는 회사 근무를 마치면 상해 황포 포구에 나와 바닷바람을 쐬며 적적한 마 음을 달래거나 번화가를 걸으며 국제도시 상해의 자유로운 공기 를 들이마셨다. 1936년 말, 그가 상해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또 한 번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젊은 민족 주의자 김지강(金芝江) 6) 과의 만남이었다. 김지강은 1919년 밀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후에 중국으로 가 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7) 에서 수학하였으며, 의열단(義烈 團) 8)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9) 등에 가입하여 독립 6) 본명은 김성수이며, 인촌 김성수 선생과는 동명이인임. 7)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군사학교로 북벌기간, 중일전쟁 및 국민당-공산당 내전기간 동안 중국의 수많은 장군, 군사지도자들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 당 육군군관학교(中國國民黨 陸軍軍官學校)이다. 이 군사학교는 중국 국민당에 의해 1924년 6월 16일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의 설립식이 광동성 광주의 황포 (黃埔)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학교의 설립식 때 손문(孫文)이 발표한 연설문이 나중에 중화민국 국가의 가사가 되었다. 장개석이 초대 교장이었고 주은래, 왕정위 등은 정치부 교관이었다. 황포군관학교는 한국의 독 립운동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8) 1919년 김원봉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단체. 1920년대에 일본 고관(高官) 암살과 관공서 테러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1920년대 말부터는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 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김원봉(金元鳳)ㆍ윤세주(尹世胄)ㆍ이성우(李成宇)ㆍ곽경(郭敬)ㆍ강세우(姜世宇)ㆍ이 종암(李鐘岩)ㆍ한봉근(韓鳳根)ㆍ한봉인(韓鳳仁)ㆍ김상윤(金相潤)ㆍ신철휴(申喆休)ㆍ 배동선(裵東宣)ㆍ서상락(徐相洛)ㆍ권준(權俊) 등 13명이 창단 단원이었고, 1924년에는 70명으로 늘어났다. 창단 직후‘공약 10조’와 뒤에‘5파괴’,‘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ㆍ 군부수뇌ㆍ타이완총독ㆍ매국노ㆍ친일파거두ㆍ적탐(밀정)ㆍ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적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ㆍ동양척식주식회사ㆍ매일신보사ㆍ 각 경찰서ㆍ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의도했다.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