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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212 니겠습니까? 간부들이 국장님 눈치만 보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바 람에 칠보발전소 경비대가 하루 두 끼를 먹다 못해 거의 굶는 실 정입니다. 매월 부대 식량으로 지급되던 쌀 90석이 원리원칙을 따 지는 바람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들이 흙을 파먹고 전투를 할 수 있답니까?” 전 某 국장은 차일혁의 강력한 항의에 경무과장을 불러 조치를 지시했다. 1951년 11월 18일. 홍 某 사찰과장의 주재로 귀순자와 재산공비 (在山共匪) 가족을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귀순한 전 북 장수군 당위원장 김 某와 부위원장 박 某가 참석하여 그동안의 빨치산 생활을 털어놓았다. 김 某의 빨치산들에게 호소하는 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특히 입산자들의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매일 정한수를 떠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어머니, 아기를 안고서 혹시나 남편이 돌아 올까 밤을 지새우는 아낙들, 지척에 있어도 만나지 못하는 그들의 슬픔을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차일혁은 입산자들이 사상 이 달라도 조국은 하나, 핏줄도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산에서 내 려와 가족들의 품에 안기길 바랐다. 차일혁은 입산자 가족을 감시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따뜻이 대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만으로 이날의 간담회가 의미 있다고 평가했다. 여태껏 악질 공비라는 말로만 불리던 것과 달리 ‘입산 자들이여! 당신의 가족은 이렇게 호소한다.’ 라는 현수막이 걸려 빨치산을 보는 눈이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 某의 귀순담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켰다. “나는 10년 넘게 공산주의 운동을 하면서 부모, 형제, 민족을 뛰 어넘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피는 어떤 사상보다도 진하다 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공산, 민주를 논하기 전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