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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208 차일혁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는 그날의 심회를 일기에 이 렇게 적고 있다. “위패 하나하나를 둘러볼 때 꽃다운 젊은 육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그 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구이작전 3명, 칠보공방전 12명, 고창수 복 11명, 내장ㆍ덕태산 토벌 13명, 명덕리 탈환 및 고창 문수산, 완주군 주변 산악전투 9명, 가마골ㆍ금산 남이면 전투 8명, 그리고 구천동 전투 로 27명의 위패를 모셨다. 구천동 작전이 다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 고 있는 6명도 전사한 것으로 보였다. 조국이 해방되면 고향에 돌아와 농사나 짓는 촌부가 되려고 했던 나였건만, 해방 후 6년 동안 나는 더 욱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헤매고 있었다. 여전히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연락병으로 명령에 충실하였던 유 某의 위패를 대하자, 차일혁 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법당에 엎드려 오열하고 만다. 유 某는 인 공 때 부역한 사실이 있었으나 차일혁은 일체를 불문에 부치고 연 락병으로 임명했다. 그는 차일혁을 위험에서 여러 번 건져 주었고 항상 곰처럼 우직하게 명령에 따랐다. 흐느끼는 차일혁을 본 주지 스님이 다가왔다. “차 대장은 참으로 강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참으로 섬세한 사람이군요.” 차일혁은 부하나 동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자주 흘렸다고 한 다. 사람들이 많을 때엔 얼굴을 돌리고 울었고, 주변에 사람이 적 으면 목 놓아 통곡했다. 그는 병사 하나하나를 진정으로 아꼈으며 전투에서 잃는 것을 자신의 수족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아파했다. 이는 빨치산의 죽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빨치산 활동을 하 다 붙잡힌 포로에게 매우 관대하여 그가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첫째로는 전향을 간곡히 권하고, 전향을 거부하면 전쟁 포로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