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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등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여 온전히 보존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을 추서받는 것이다. 화엄사는 국보급 문화재인 각황전이 있는 지리산의 명 사찰 중의 하나다. 화엄사를 지켰던 공로 외에 그는 명창 임방울의 수궁가 판소리를 보존하는데 기여했고, 학도 병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또한 1951년 영화 ‘애정산맥’의 제작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같은 공로를 모두 인정하여 현 정부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이라는 영예를 수여한 것이다. 차일혁 총경은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에서 ‘문화경찰’이란 말 을 처음 만들어 썼다. 그동안 건국경찰, 호국경찰, 민주경찰 등의 용어는 많았어도 ‘문화경찰’은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고, 그것은 지 금도 마찬가지다. 경찰과 문화의 상관관계는 그만큼 멀다. 더구나 1950년대 공비들의 준동이 극심하던 전북, 전남, 지리산 등지에서 토벌대장으로 근무하던 그가 ‘문화’를 말했다는 것 자체가 센세이 셔널한 일이었다. 문화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게 되는 법이다. 차 일혁 총경이 지녔던 문화적 감수성과 소양은 여느 경찰, 군인에서 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이면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따라다니 는 수식어인 ‘빨치산 토벌대장’에서 용감무쌍한 전투지휘자의 모 습을 상상하지만, 그는 멋을 알고 예술을 즐기며 문화의 소중함을 아는 무인(武人)이었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중국에 건너가 항일무 장투쟁전선에서 조국의 해방을 그리며 이십 대를 보냈고, 광복의 기쁨도 잠시 6・25전쟁이 터졌을 때 묵묵히 책임지는 자세로 전투 경찰에 입문했던 그가 진정 원하고 그렸던 조국의 모습은 군사강 국이 아니라 문화강국이 아니었을까? 기념식장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일본에서 몰려온 욘사마의 팬 들이 연신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차일혁 총경 사망 50주년이 기도 한 2008년도의 오늘, 아시아의 대중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