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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 지리산, 그리고 이현상 205 ❚철인의 눈물 1951년 10월 20일. 차일혁 부대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덕유산 대 토벌을 개시하였다. 52) 덕유산을 샅샅이 뒤지면서 적들의 아지 트를 분쇄하였다. 신대부락 주민들 가운데 빨치산의 짐을 지고 갔 던 남자들도 대부분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차일 혁 부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차일혁은 그들이 마지못해 빨치산 의 짐을 날랐다는 죄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차일혁 부 대가 주민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자 차일혁을 찾아와 정보를 알 려주었다. 주민을 통해 차일혁은 적에게 포로가 된 18대대 대원들 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수색을 하던 무주경찰서 사찰유격대 김 某 순경이 적들의 정찰 대 3명을 사로잡아 왔다. 차일혁은 그들을 심문하여 몇 가지 놀라 운 사실을 알아냈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구천동 전투에서 그나 마 18대대의 피해가 줄어들었던 것은 차일혁이 협곡을 피해 산위 의 험한 길을 택해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적들은 협곡 곳곳에 잠 복해 차일혁 부대를 전멸시키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불꽃사단이라 불리는 빨치산 57사단은 여순반란사건 당시 지리 산에 입산하였던 반란군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6ㆍ25전 부터 이현상의 직속부대로 활약해 왔다. 57사단은 원래 경남도당 산하 부대였지만 반란군 출신 이영회를 대장으로 맞아 독자적으 로 덕유산 무주구천동까지 진출했다. 57사단이 이번에 덕유산에 온 것은 이현상의 지령으로 6지대와 합류하고 경찰부대를 전멸시 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들은 18대대에 큰 타격을 입혔으나 원래 구상한 대로 전멸시키지는 못했다. 52) 본문은 18대대원이었던 김규수ㆍ김병철 옹의 증언과‘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 기’를 토대로 작성한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