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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 지리산, 그리고 이현상 189 란군의 잔당들이 주동이 되어 있는 부대로 경남, 경북, 전남을 거 침없이 넘나들고 있던 신출귀몰한 부대였다. 그래서 57사단은 흔 히 불꽃사단이라 불리었다. 아직은 산악전이 서툰 6지대였지만 57 사단과 합류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큰 세력으로 바뀔 거라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했기 때문에 차일혁은 57사단은 놓치더라도 먼 저 6지대를 섬멸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차일혁은 6지대를 토벌하기 위해 유인작전을 쓰기로 했다. 부대 원 약 300여명이 57사단을 포위하는 듯 포진해서 6지대로 하여금 아군의 후미를 공격하게끔 작전을 구상한 것이다. 차일혁이 이끄는 17, 18대대는 구천동 삼공리, 안성면, 무풍면에 서 57사단이 준동하고 있는 심곡리를 향해 병력을 배치해서 6지 대를 유인하였다. 6지대가 아군의 후미를 공격할 것에 대비해서 중화기는 모두 6지대가 공격해 올만한 지점을 조준하였다. 이 작 전이 성공한다면 6지대를 완전 섬멸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심곡리에 있는 57사단을 포위하는 듯한 포진으로 6지대를 기다 렸지만 적들은 금세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무풍면 은천리에 주 둔한 경찰부대가 빨치산의 공격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은천리 에서 적들의 공격을 대비하던 무주경찰서 수비대 20명은 적들이 바리케이트까지 다가와 던진 수류탄에 희생되었다. 6지대를 먼저 섬멸한 뒤 지리산으로 넘어가는 57사단을 섬멸하 려는 이 작전에서 만약 6지대가 57사단과 합류하러 오지 않는다 면 57사단마저도 놓쳐버릴 우려가 있었다. 1951년 10월 2일 새벽 2시. 수효를 알 수 없는 적들이 5미터 간 격으로 아군에 접근하고 있다고 척후병이 차일혁에게 보고했다. 차일혁은 부대의 포진을 넓히고 적들이 중화기 집중 사격권 내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적들은 덕유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 나 적들은 덕유산 입구 부근으로 1개 소대병력을 전진시키고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