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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178 그를 대하지 말고 포로로 공정하게 대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8월 27일엔 항공기의 지원이 있었다. 항공기들은 계곡과 계곡을 누비면서 목표 지점을 정확히 폭격하였다. 약 1시간의 폭격을 마 친 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여운을 남기고 폭격기들은 돌아갔 다. 무서운 폭격에도 용케 숨어있던 적들은 박격포와 수류탄으로 대항해 왔다. 차일혁은 최후의 돌격을 명령했다. 적은 수없는 시 체를 남기고 도주했다. 차일혁이 직접 18대대를 지휘하여 가마골 계곡을 내려갔다. 몇 백 년 묵은 칡덩굴이 우거져 있고 다래와 으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 었다. 보신병 김규수 경사, 연락병 유 某 순경, 전북일보 윤석호 기 자와 함께 계곡 밑으로 내려갔다. 곳곳에 가마니가 깔려 있었다. 앞 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밀림 속에서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몰라 신경 을 곤두세운 채 내려갔다. 밀림이 끝나고 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공시절 이후 군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차일혁은 자신도 모르게 “여기가 가마골”이라고 소리쳤다. 적들 은 달아나 버리고 토굴 같은 아지트가 군데군데 보였다. 난공불락 이라고 생각했던 적들은 반영구적인 건물을 지어 놓았다. 집집마 다 노획해 온 식량으로 술을 담아 놓았다. 인민학교도 있었고 발 동기며 그라인더도 설치되어 있었다. 밭농사와 논농사도 깨끗이 되어 있고 곳곳에는 퇴비가 쌓여 있었다. 자동차도 4대 있었다. 가 마골은 작은 인민공화국이었다. 이 작전에 참가했던 김병철 옹의 증언에 의하면, 각 건물마다 학교, 인민위원회 등의 간판이 걸려 있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고 한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안전한 해방구로 믿고 있었던 가마골을 점령당한 빨치산들은 이 작전으 로 심리적으로 대단히 위축되었을 터였다. 1951년 8월 28일. 최 경무관과 전남 연합부대 사령관이 가마골 을 둘러보았다. 이번 전투의 전과는 사살 135명, 생포 95명, 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