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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156 군을 지휘하기 위해 그는 서울에서 순천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반 란군 600명을 규합하여 지리산에서 정식으로 유격대를 결성한다. 이현상의 지리산 입산으로 빨치산의 활동은 활발해졌고, 점차 주 변의 재산공비(在山共匪)들과 야산대 등이 세력을 합쳐 덕유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당시 이현상이 지휘한 빨치산의 대표적인 활동은 무주경찰서 습격이었다. 1949년 11월 5일 새벽 3시, 그의 부대는 당시 무주경 찰과 대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교묘한 유인전술로 한때 무 주면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때부터 이현상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1년 5월에 있었던 청주습격 사건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으며, 한층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현상 부대는 전투에 있어서 유격전보다 정면 공격을 주 로 하였다. 그동안의 여러 차례에 걸친 토벌로, 공비들은 맹호마크를 가진 차일혁 부대를 보기만 해도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만만해 보이는 경찰서 부대를 앞세워 차일혁 부대는 출동하지 않 은 것처럼 가장해 있다가 토벌전을 벌이곤 했다. 공비들에게 차일 혁 부대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앞으로 조만간 있게 될 이 현상과의 접전이 차일혁에게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신화적인 존 재로 떠받들어지는 그의 실체를 하루빨리 벗겨 보고픈 충동이 차 일혁의 가슴속에 들끓고 있었다. 1951년 6월 25일, 잊을 수 없는 동족상잔인 6ㆍ25가 일어난 지 1주년을 맞아 전 대원들이 부대본부에 모여 공비토벌의 결의를 다졌다. 이현상 남부군의 남하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비록 많 은 공비 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차일혁 부대 가 있다고는 하지만, 청년방위대와 향토방위대의 해산, 그리고 국 군의 일선 복귀 예정으로 인하여 전북의 치안은 고스란히 차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