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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152 관해 놓은 종자마저 탈취해 민심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외 치는 전 인민적인 폭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이 드러났다는 것 이 차일혁의 견해였다. ❚이현상의 남하 1951년 5월 28일. 차일혁이 경 비사령부의 급한 호출을 받고 도 경에 들어가니 도경 수뇌진들과 며칠 전 부임한 미 고문관 제이 미 대위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급박한 사태가 발생 한 듯한 분위기였다. 충북 도청소 재지인 청주가 공비들의 기습으 로 인하여 행정이 마비되고 공비 들은 각 기관들을 점령하여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는 정보였다. 남부군단장 이현상은 여순반란 사건 이후 지리산과 기타 지역에 은거하던 공비들을 규합하여 유 격전을 벌였었다. 지난 해 인민군 남침 시 지리산에서 나와 무주 와 금산을 거쳐 경남에 속한 지리산에 웅거하다 같은 해 9월 아군 의 총공격으로 자신들이 고립되자, 다시 북상하여 태백산 일대를 거쳐 11월 중순 강원도 후평리에서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이후 승 리사단 400명, 혁명지대 60명, 인민여단 150명, 사령부 직속부대 150명 등 도합 800여명으로 남진하여 51년 1월 3일 문경, 제천 부 근으로 이동하여 단양읍을 경유해 2월에는 속리산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태백산지구 전투경찰대와 교전하고 있었다. 이현상 부대의 ▲빨치산 대장 이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