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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i - 절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앙군관학교를 나와 항일전선에 뛰어들었 다. 그 경력만으로 우리 경찰 초기의 상처인 친일의 잔재를 씻어 준다. 해방 후 좌우 대결은 험악했다. 차일혁은 남쪽으로 향했다.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대한민국을 선택했다. 남한은 번영했다. 옛 소련의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그의 라이벌인 이현상이 선택한 북한은 굶주림과 정치탄압 지대다. 항일과 자유민주주의 선택은 통찰력 있는 의지의 소산이다. 그의 리더십은 현장에서 돋보였다. 차일혁 부대의 화력은 열악 했다. 그러나 빨치산 토벌에서 가장 앞선 공적을 쌓았다. 그는 부 하들과 함께 동거동락 했다. 그 온화한 카리스마가 부대의 전력을 높였다. 전투경찰로서 그의 용병술은 뛰어났다. 이현상 부대는 끈질겼다. 그가 사살된 것은 휴전(1953년 7월 27 일) 두 달 뒤다. 이현상의 시신은 서울로 옮겨져 시민들 앞에 전시 된다. 그만큼 이현상의 존재는 상징적이었다. 그의 시신은 지리산 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직후 드라마 같은 반전이 있었다. 차일 혁은 그의 장례식을 치른다. 적개심 넘치는 좌우 대결의 당시 상 황에선 어려운 결단이었다. 차일혁은 시신을 스님의 독경 속에 화 장했다. 그 뼈를 섬진강에 뿌렸다. 그리고 권총 3발을 하늘을 향해 발사했다. 그 의식은 관용과 해원(解寃)의 메시지였다. 동족상잔 (同族相殘)의 죽고 죽이는 비극을 더 이상 재현해선 안된다는 조 용한 몸부림이었다. 그의 관대한 리더십은 통일 한국의 미래 경찰 의 모습이다. 그는 지리산 화엄사를 지켰다. 화엄사는 빨치산의 은신처로 활 용됐다.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차일혁은 그 명령 을 슬기롭게 이행하고, 지혜롭게 거부한다. 문짝 일부만 떼어내 불태우는 것으로 엄격한 전시 명령에 따른다. 그리고 국보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