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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139 있다. 즉 전라북도 경찰 제18전투대는 그간 수십 차에 걸친 공비소탕에 혁혁한 전과를 걷우어 그 용명은 전국적으로 찬란히 빛나는 바 있는데 거번 공비들이 후방기지 전북을 암흑화하려고 대부대로 포위 습격해 오 자 차일혁 대장이 지휘하는 동 전투대는 과병으로 용약 출동 수일간에 걸친 가열한 전투를 계속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치고 적의 흉책을 분쇄 하여 칠보발전소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혁혁한 무공이 중앙에 전해지 자 치안국장은 동부대의 공훈을 높이 칭찬하고 표창장과 부상으로 30만 원을 전달해 왔는데 동부대원들은 “우리는 경찰관으로서 또한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인데 돈까지 받기는 너무 죄송하니 우리보 다 더 못한 전재민들의 구호비에 써주시오” 하고 30만원을 봉투째 본사 에 기탁하여와 본 사원을 비롯 일반의 칭송이 자자한 바 있다. 그런데 동 부대는 산간벽지에서 아무런 보급도 받지 않고 있어 남루한 전투복 에 군화조차 없어 집신을 신은 대원이 70여명이나 있는 현상인데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동에 나온 것은 조국광복을 위해 꾸준한 투쟁을 계속 한 차대장 이하 전 대원이 멸공구국과 민폐제거에 불타는 조국애와 동 족애를 표시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도 김가전 지사는 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기대한다. 김지사 談 이는 그야말로 민주경찰의 길을 그대로 밟아 가는 행동으로 전경찰관 의 구감이라 할 것이다. 동 부대는 민중의 두터운 지지를 받아 앞으로 도 훌륭한 무공을 세울 것으로 기대한다. 1951년 5월 6일. 차일혁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비보를 접했 다. 전날 저녁 늦게 8사단과의 합동작전을 위해 정읍으로 향한 1 중대장 우희갑 경위가 정읍군 북면 지서 앞에서 공비들의 기습을 받고 운전사와 함께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는 차일혁 부대에서 중 추적 역할을 해온 대원이었으며, 차일혁에게 부하이면서 동지이기 도 했다. 차일혁은 그가 전사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았다. 차 일혁은 밤중에 그가 작전 수행차 떠날 때 잡지 못한 것이 한스러 웠다. 차일혁과 이병선 작전참모가 밤이 늦었으니 다음 날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