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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136 에도 문화공연을 감행하였고, 특히 포로가 된 빨치산들에게까지 공연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공연 도중 잠시 적의 습격이 있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연을 진행시켰는데,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은 뜨거운 민족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토벌대도 빨치산도 없고 동포와 겨레만 있었던 이 문화공연으로 카타 르시스의 절정을 맞게 되면서 포로들이 모두 귀순하게 된다. 그 누구보 다도 문화를 사랑하고 존중했던 차일혁 대장의 믿음직한 인간미와 뜨거 운 동포애에 감동받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포상금으로 피난민을 돕다 1951년 5월 2일. 차일혁은 18대대를 이끌고 전주로 돌아왔다. 오 후 2시 30분 전주 서중에 도착하여 부대를 정비하고 차일혁은 도 경찰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지난 3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의 공비토벌 종합 보고가 있었고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치안국장의 표창장 전달 이 있었다. 전라북도가 기간 중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실적을 거 두어 표창을 받게 된 것이다. 임실, 고창, 순창, 무주경찰서장과 서 원들에게 표창 및 포상이 주어졌고, 차일혁 부대는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김가전 지사의 격려사가 끝나고 차일혁에게 공비토벌에서 느낀 점을 발표하라는 느닷없는 요청이 있었다. 차일혁은 준비가 없어 망설였지만 거의 모든 기관장과 군 관계자들, 미 고문관들이 참석한 자리인지라 작전 중 느낀 점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았 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민의 안정된 생활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설하고 투항하는 빨치산에게 관대할 것을 요구했다. “평상시 행정경찰의 개념을 떠나 비상시의 경찰, 즉 전투경찰로 서 느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비가 출몰하는 산간벽지에 있 는 동포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피난을 가지 못한 죄로 군경 토벌대와 공비들 틈바구니에 끼여 군경들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