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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115 작전을 하라며 굳은 악수를 청하였다. 이 자리에서 차일혁 부대와 국군은 힘을 합쳐 정읍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경찰이 입수한 각종 정보를 분석한 결과 정읍의 공비들 은 주변지역의 숱한 지방 공비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어서, 어느 일부 지역만을 공격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읍은 행정이 복구되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치안부재에 가까 운 상태였다. 이번 군경 합동 작전에서 차일혁 부대는 정문산, 입 암산, 쌍치 등지의 공비들을 추격하여 8사단 작전지역으로 밀어붙 이는 것이다. 차일혁은 정읍으로의 출동에 앞서 이병희 사찰과장 이 마련한 자료와 정읍경찰서 사찰계장이 마련한 자료를 자세히 검토하며 작전을 구상하였다. 전쟁개시 이래 정읍의 인명 피해는 4월 초 현재 사망 2,516명, 중상 761명, 경상 820명, 행방불명 1,646명, 주택피해 전소(全燒) 4,416호, 반소(半燒) 5,969호로 많은 피해를 입어, 3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다. 정읍은 정주읍과 신태인읍 2개의 읍과 18개의 면을 가진 곳으 로, 전북에서 농토가 기름지고 산림이 울창해 물자가 풍부한 곳으 로 널리 이름이 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지주들이 많아서 인구의 대부분은 소작으로 연명하고 있는 빈부의 차가 극심한 곳이었다. 따라서 전북에서 가장 좌우익의 대립이 심했다. 적 치하에서 우익 인사들이 가장 많은 죽음을 당했고, 이로 인한 원한과 갈등도 이 루 말할 수 없었다. 적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백암부대 300명, 왜가리 부대 야산대 300명, 정읍군당과 각 면당부대 300명, 기포병단 300 명, 기타 300명, 도합 1,500명 가량의 적들이 정읍에 인접한 산악 지대에 포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