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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109 차일혁은 쓰러진 두 학생을 차에 싣고 근처에 있는 삼락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들은 인천공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로, 아직 그 지역이 작전지역이라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민 대열에 서 있 다가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이들은 제2국민병에 응소해 체력 미달로 불합격되었으나, 오도 가도 못하고 제대로 먹 지도 못해 영양실조로 쓰러진 것이다. 말이 제2국민병이지 예산도 없이 무리하게 제2국민병을 뽑아 놓고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 못해 피난민과 다름없었고 더욱이 불 합격한 장정들을 후송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아, 많은 장정들 이 피난민 대열에 섞여 있다가 죽어가기도 했다. 전북에서 제2국민병에 응소한 젊은이들은 삼천포, 사천, 진주, 마산 등지에 분산, 수용되어 있었으나 차일혁이 얼마 전 김가전 전북지사와 함께 그들을 방문한 결과, 수용과 훈련에 많은 문제점 을 안고 있었다. 제2국민병의 무분별한 징병에 대해 알고 있는 사 람들은 그 대신에 전투경찰에 들어오려고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일혁 부대는 대원 모집에 애를 먹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오 히려 밀려드는 지원자로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 김근수 인사주임 의 보고였다. 모두가 무분별한 징병제도에서 비롯된 혼란이었다. 차일혁은 길에 쓰러져 있던 두 학생이 회복된 뒤 18대대에 입대 시켰다. 많은 대원들의 입소로 차일혁 부대는 더욱 활기차게 훈련 에 임하게 되었으나 예산상의 부담이 적지 않았다. 차일혁 부대에 통합되었던 17대대가 4월 3일 도 경비사령부의 특명으로 복원되었다. 18대대만으로는 인원과 장비가 비대해져 행 정상의 애로가 많아, 17대대를 복원시키게 된 것이다. 대대장은 차일혁이 겸임하게 되었고 부대대장은 28세의 김석원 경감이 맡 게 되었다. 김 경감은 여순반란사건 이후 전남에서 공비토벌에 참 가한 경험이 많은 유능한 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