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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100 간석지에 올려놓은 어선 속에 숨어 있다가 생포되었다. 끝까지 도 주하거나 극렬하게 반항하는 적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날 이 어두워 저녁 9시경 일단 추격을 중지하였다. 이튿날인 31일 미 명을 기해 다시 공격을 감행하였다. 계속된 작전으로 적들은 사분 오열 흩어져 상호간에 연락이 두절되었다. 서로 선을 이으려고 애 쓰던 빨치산들이 몇 명 생포되었다. 이틀 동안의 작전으로 36중대 부대장과 용강로 군단장 박 某가 사살되었고, 부안면 면청위원장 이 생포되었다. 사살된 용강로 군단장(일명:박달부대장) 박 某는 부안면의 저수지를 파괴하여 부근 일대를 물에 잠기게 하여 많은 주민들을 희생시킨 자였다. 그는 18대대의 맹렬한 공격에 부하들 을 거의 다 잃고 두 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고향인 부안면 오산리 에 숨어 있다가 향방대원에게 발견되어 사살된 것이다. 그 외 인 민군 군복 150벌, 불온문서 다수, 소련제 전화기 1대, 생포 152명, 각종 실탄 4천발, 조흥은행권 15만원 등의 노획물을 획득하였다. 부안 일대의 공비들을 토벌한 18대대는 부안면 반암국민학교에 대대지휘소를 두고 심원국민학교에 전방지휘소를 설치하여 주둔 하면서 선무공작과 잔비소탕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공비의 목을 자르지 말라43) 당시 도경에는 정순식 경비계장이 보안계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43) 본문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다만 당시 전과 확인을 위해 이와 같은 반인륜적인 방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사료를 구할 수 없어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대목이 기술된 수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할 경우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하고 심도 있게 논의를 거듭하였다. 찬반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수기가 이 미 책으로 출판되어 공개되었고 차일혁 총경의 불의에 맞서는 정의와 용기, 실용적 사고 등 훌륭한 정신이 일관되게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