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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 - 1951년 6월 11일자 전북일보에는 “공비토벌 중 소를 2마리 노획 하였으니 주인은 찾아가시오”라는 당시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공 고가 실렸다. 토벌대원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 딱 맞는 노획물이 었지만, 소를 잃어버린 농민의 좌절을 가슴 아파한 차일혁 총경이 신문에 공고를 낸 것이다. 고창작전 중에는 공비가 주민들에게 빼 앗아 저장하느라 저수지에 빠뜨린 벼 700가마를 저수지 물을 빼 내어 주민들에게 배분하기도 하였다. 무주경찰서장 재직 시에는 전쟁으로 인해 관내 1천 2백호의 가옥이 파괴되어 주민들이 움막 생활을 하게 되자 참호용 자재를 보급하여 주민들에게 가옥 1천 호를 지어주었고, 공비토벌이 거의 끝나 지리산에서 총성이 잦아 들 무렵인 1954년 9월 충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서는 충주직업 청소년학교를 만들어 전란으로 부모와 집을 잃고 갈 곳 없는 유랑 소년소녀들이 학교공부와 직업교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Ⅲ 1958년 8월 9일 어린 아들과 오랜만에 금강으로 물놀이에 나선 차일혁 총경은 조선의용대 시절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 다. 노래를 마친 차일혁 총경은 아들에게 수없이 치렀던 전투과정 을 재현하듯 몇 차례의 수영시범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차일혁 총 경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차일혁 총경은 그렇 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19시간이 지난 뒤 발견되 었다. 물 속에서 차일혁 총경은 곰나루 근처를 도강하다 가라앉은 인민군 탱크를 끌어안고 있었다. 당시 부검의사는 차일혁 총경의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결론지었다. 차일혁 총경의 부하들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ꡔ18동지회ꡕ 라는 모임을 통해 매월 18일이 되면 살아 있는 경찰의 혼 차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