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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선생 기적비(金道鉉先생紀績碑), 남자현지사기적비(南慈賢志士紀績碑)와 엄순봉의사기적비(嚴舜奉義士紀績碑) - 김도현선생은 1907년 고종이 직접 의병 봉기를 촉하는 밀지를 그에게 내리자 이에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후에 의병을 해산하고 영양에 영흥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4년 망국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고 영해의 관어대(觀魚臺) 앞바다에서 투신자살하였다. - 남자연지사는 김영주와 결혼했으나, 을미사변 때 남편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전사하여 25세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유복자 김성삼을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곧바로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 엄순봉의사는 김좌진장군의 휘하에 들어가서 청년층 막료의 한사람으로서 활약하였다.